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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미 Jun 15. 2024

별을 보다 보면 해가 뜬다

DAY4. 바투르 화산에서 태양을 맞이하다

 발리 DAY4의 하루는 새벽 3시부터 시작됐다. 예약해 둔 바투르산 일출 투어에 가기 위해서다. 픽업 차량을 타고 산 입구까지 간 후, 지프차로 갈아타 일출 스팟까지 오르는 코스다. 숙소 앞까지 오는 픽업 차량이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서 후다닥 준비해 나갔다.


차에는 이미 한 명의 동행자가 타 있었는데, 당일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일출을 보러 온 대단한 체력의 소유자 S였다. 새벽에 깬 자와 잠들지 못한 자의 첫 만남, 어둑한 도로 위로 이어지는 비몽사몽한 대화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틀 전 우연한 만남을 가졌던 Y언니까지 픽업해, 지프로 갈아타고 꾸불꾸불 산길을 올라갔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면 일출을 보러 온 수많은 지프차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인데도 자동차 조명 때문에 전혀 어둡지 않았다.

평평한 땅 위에 지프를 세우고, 기다림을 시작했다. 주차를 마친 지프 행렬이 모두 시동을 끄자 하늘 위 빛나는 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독 구름이 없는 날이었는지 밤하늘 빼곡히 별이 가득 차 있었다. 별을 바라보며 태양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니, 꽤 낭만적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넋 놓고 별을 구경하고 있는데, 가이드 페리가 장비를 챙겨 다가왔다.


"지프 위로 한 명씩 올라가요!"

"지프 위로...?"

"포토, 포토!"


바투르산 일출 투어에는 대부분 인생샷을 남겨주는 코스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제부터 시작인 모양이었다. 사진을 얼마나 잘 찍어주냐에 따라 투어사 인기의 척도도 갈린다고 했다.

우리의 페리는 그 점에서 실력과 열정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아주 완벽한 가이드였다! 신중히 노출점을 잡는 모습부터 심상치 않더니, 만족스러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외계와 소통하는 길의 길잡이가 된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 이 사진도 그가 챙겨 온 장비 덕분에 가능했다. 다짜고짜 쥐어 주더니 하늘을 향해 쏘아 보란다. 그대로 따라만 했는데 난 어느새 멋진 길잡이가 되어 있었다.


이외에 포즈도 이것저것 추천해 줬는데, 그가 선호하는 몇 가지 포즈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손흥민의 시그니처 세리머니였는데 가이드의 지시에 맞춰 셋이 나란히 그러고 있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던 페리는 우리가 지친 모습을 보이자 아침밥을 준비해 주었다. 쏟아지는 별 하늘 아래, 추위에 떨며 지프 뒷좌석에 앉아 먹는 단출한 아침밥. 오, 청춘인가? 멀리서 보면 그래 보였을 수도 있지만, 청춘의 맛을 느끼기엔 샌드위치의 맛이 너무도 요상했다. 카야잼인지 바나나잼인지 모를 비릿한 맛.

조금씩 배를 채우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번지는 태양빛에 지지 않고 여태 빛나고 있는 저 별은 금성이었을까?

해가 떠오르는 곳으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지프차를 쪼르륵 세워 두고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귀여워 자꾸만 셔터를 누르게 됐다. 다들 어떤 생각을 하며 해를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빨리 떠오르길 바라는 마음만은 같겠지.

태양이다! 빼꼼 솟아오르더니 곧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오기 바로 전날엔 구름이 가득 껴 별도 해도 보기 힘들었다고 하던데, 운이 좋았다. 한국에서는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일출을 발리 바투르산에서 맞이하다니. 여행은 평소에 하지 않던 일을 애써, 굳이 하게 만들어 준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이제는 하산할 시간. 내려갈 때는 다시 졸졸 줄을 지어 내려간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엽다.

내려가는 길에는 화산 폭발의 흔적이 남은 구역에 들렀다. 저 까만색 돌들이 다 용암이다. 뜨거운 열기가 아직 남아있는 걸까. 유독 덥고 뜨겁고, 한쪽에선 파리가 들끓었다. 바로 뒤 아궁산이 너무 푸르러 대비가 더 크게 느껴졌다. 죽은 땅과 살아있는 땅이 바로 맞닿아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이면서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투어의 마지막 코스로 도착한 곳은 아궁산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카사 카페>다. 1시간 정도 여유 시간을 주니 앉아서 음료나 음식을 시켜 먹으면 된다. 다른 투어사들도 코스가 다 똑같은지, 사람이 매우 붐볐다.

인파가 납득되는 뷰. 커피 한잔을 마시며 S와 Y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새벽부터 시작된 투어에 피곤함을 나눈 동지애 같은 감정에서인지 나에 대한 이야기가 술술 튀어나왔다.


아니, 사실은 아니다. 여행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사실 늘 그렇다.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고 '나'를 꺼내 보여준다. 현실에서는 어려운 그것이 여행에서는 그토록 쉽다. 주변의 어느 끈과도 이어지지 않는 곳에서 만난 누군가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에 가이드를 조금 기다리게 해 버렸다. 픽업 차량을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S와는 내일 일정 동행 약속을 잡았다.

졸림보다 배고픔이 더 앞섰기 때문에,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식당에 들어갔다. 숙소 바로 앞에 위치한 식당이었는데 구글 평점이 좋길래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미고랭을 한 입 먹은 순간 깨달았다. 이 집, <엔젤와룽>은 맛집이라는 사실을. 우붓에 있는 동안 무조건 한 번 이상 더 와야 하는 곳임을! 숙소 바로 앞에 이런 곳이 있다니, 정말 행운이었다. 발리에서 수많은 미고랭을 먹었지만 엔젤와룽의 미고랭을 이긴 곳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어제 저녁을 함께 먹었던 동행 E와 함께 수영장이 있는 카페에 갔다. E에게는 굳이 말한 적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 내 개명 전 이름과 같았기 때문에 왠지 모를 약간의 친밀감이 있었다. 나는 비록 그 이름을 떠나왔지만, 당신은 그 이름에서 안녕하십니까와 비슷한 감정이랄까.

원래는 간단히 음료만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눕고 싶은 자리가 미니멀 차지가 있었다. 금액을 채우기 위해 부려본 사치. 현실은, 물에 동동 떠서 햄버거를 먹는 내내 흘리면 어떡하지 생각뿐.

해 뜨는 걸 보기 위해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강행군을 펼쳤지만, 사실 선라이즈보단 선셋을 훨씬 더 좋아한다. 오늘은 하늘이 어떤 색으로 물들까에 대한 기대감, 화려하게 물들었다가 짙은 파란색이 되었다가 이내 완전히 색을 잃을 때의 고독감, 선셋을 놓칠까 봐 포인트까지 달려가는 길의 두근거림과 같은 감정을 사랑한다.

우붓에서 본 선셋의 색깔은 대체로 보랏빛이었다.

나가는 길에 몇 번이고 뒤돌아 보게 만들었던 해 진 후의 카페. 라라랜드의 하늘 색깔 같다.

저녁을 먹기 위해 또다시 엔젤와룽에 갔다. 이번에 주문한 것은 참치 스테이크와 정체 모를 튀김. 바나나 튀김이 맛있다기에 그걸 먹고 싶었는데 소통의 오해가 있었는지 다른 튀김이 나왔다. 무엇을 튀긴 건지는 아직도 정체가 모호하지만 맛있어서 그냥 먹었다.


여행에서는 안 해본 일이든, 안 먹어본 음식이든 다짜고짜 입에 넣어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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