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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미 Jun 22. 2024

뙤약볕과 뜨갈랄랑을 가로질러서

DAY6. 자전거를 타고 일상을 훔쳐보다

 새콤 달콤 풍미 가득한 발리의 스무디볼은 정말 맛있다. 대부분의 카페, 레스토랑에서 스무디볼을 팔고 있고 그만큼 사람들도 많이 즐긴다. 다양한 인종, 문화권이 섞인 동네에서 먹기에 가장 보편적이어서 그런가, 하며 혼자 짐작해 보았다. 가벼운 한 끼 식사, 특히 조식으로 이만한 메뉴가 없긴 하다.

오늘도 픽업 차량에 탑승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자전거 투어에 가기 위해서다. 동행자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을 가지는 N. 자전거 투어는 혼자 가면 영 심심할 것 같았기 때문에 열심히 꼬셨다.


자동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을 통해, 우붓 변두리 작은 동네까지 향하는 코스가 마음을 끌었다. 뙤약볕에 라이딩이 괜찮겠냐며 만류하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고집을 부렸던 이유기도 했다. 내리쬐는 태양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투어는 매우 이른 시간 시작되었다.

자전거 라이딩이 시작되기 전, 픽업차를 타고 향한 장소는 커피농장이었다. 투어라면 으레 하나씩은 갖추고 있는 여행객 특화 상품인 모양이었다. 마중 나온 직원을 따라 커피농장 곳곳을 거닐며 인도네시아의 특산품, 루왁 커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커피 열매 재배지부터, 철장에 갇힌 사향고양이를 지나, 원두 볶는 현장까지.

 

발리 거리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고양이, 개들만 보다가 덥고 좁은 철장에 갇혀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사향고양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해졌다. 동물에게 향하는 관대함이 적용되는 영역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별개로 찌는 듯한 날씨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묵묵히 버티며 원두를 볶는 모습은, 마치 수련하는 이를 떠올리게 했다.


"한 번 해볼래?"


기회를 얻어 불 앞에 앉자마자, 열기가 바로 얼굴을 덮쳤다.


"덥지 않아요?"


그 질문에 고행자는 그냥 한 번 웃고선, 다시 묵묵히 원두를 볶았다.

짧지만 길게 느껴졌던 커피 강습이 끝난 후에는 한입씩 돌아가며 맛볼 수 있는 테스터 커피와 간단한 간식이 주어졌다. 똑같은 카페라 같아 보여도 첨가된 맛의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 망고스틴 맛 커피, 코코넛 커피 등등. 1번부터 13번까지의 모든 커피를 맛보며 호기심을 채웠다.


따로 덜어 먹을 컵이 없으니 모두 함께 작은 커피잔을 공유해야 했다. 투어에는 N과 나 말고도 몇몇의 사람들이 더 있었는데, 난생처음 만나 같은 컵을 공유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우리 방금 간접키스 했을 지도요?

투어에 껴있는 여행객 특화 상품답게 커피 농장의 한쪽에는 뜬금없이 발리스윙을 비롯한 포토존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서 인생샷을 건져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사진을 담당하는 직원들의 실력이 영 별로인 것 같아 관뒀다. 때문에 발리 스윙을 타는 투어 동지들을 한참 기다려야 했다.


괜찮아, 그늘에 누워 있으면 되니까.

K-드라마 보는 발리 아저씨들 구경하기. 당시 한국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되던 드라마로 기억하는데, 벌써 더빙판을 틀어주고 있어서 그 속도에 감탄했다.

드디어 자전거에 올라탈 시간이 왔다. 투어를 시작한 지 두 시간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N에게 자전거 실력 좋다며 한껏 뽐내 놨는데, 타자마자 삐끗해서 조금 창피했다. 따릉이만 타던 내가 바로 적응하기엔 자전거가 전문적이었던 탓이다.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자면, 두 다리가 알아서 페달을 밟았다. 대체로 내리막길이라 힘을 쓸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뙤약볕 때문에 땀이 흐를 때마다 옆으로 흘러가는 바람이 식혀 주었다.


조금 더 빨리 달리고 싶었지만, 가이드의 지시 하에 모두와 함께 속도를 맞추어야 했기에 욕심은 잠시 내려두었다.

얼마간 달리던 자전거 탐험대는 한 아기자기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발리 현지 아이들이 실제로 다니는 초등학교였다. 가이드는 발리의 교육 과정을 설명해 주더니, 안으로 들어가 학교 구경을 하라고 했다.


아, 투어 설명에 쓰여 있던 현지인의 삶과 가까워지기 체험이 이런 거였구나. 이때서야 깨달았다.


창문으로 슬쩍 건물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낯선 이들의 방문이 익숙한지, 힐끗 한 번 쳐다보고 말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의 내가 겪었다면 썩 유쾌하지 않았을 경험일 것 같아서 창문 훔쳐보기는 그만두었다.

왠지 모르게 찝찝해지는 감정은 몰아내고, 열심히 걸어가는 까만 강아지의 뒤를 따라 다시 페달을 밟았다.

두 번째 목적지는 꽤 커다란 사원이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밖에서 기웃기웃 구경했다. 굳게 잠긴 사원의 문 앞에 모두 모여 처음이자 마지막일 단체사진을 찍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볼 일 없을 사람들과 어쩌면 영원히 남을 사진 한 장에 묶이는 기분이란 참 재미있다.

그러니까, 현지인의 삶과 가까워지기란 정말 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자전거 염탐꾼들의 세 번째 목적지는 한 민가였다.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우리를 맞이한,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한쪽에 앉아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투어사와 거래를 맺고 집을 오픈하는 것일 테니 학교 때보단 마음 편히 집을 둘러보는데, 할머니의 손녀가 등장하곤 다시금 불편해졌다.


아까 방문한 학교에서 잠깐 마주쳤던 소녀였다. 열세 살 남짓, 교복을 입은 소녀는 할머니 옆에 앉아 뜨개질로 완성된 모자와 장신구 등을 우리에게 권했다. 익숙해 보였지만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부끄러움이 묻어난 채였다. 소녀는 어른들의 거래에 동의했을까?

또다시 불편함이 몰려오자 외면하고 싶어져 더위에 뻗은 동물들만 열심히 쳐다봤다. 그중 가장 깨발랄했던 아기 강아지 한 마리를 겁 없이 불렀다가 이빨에 손가락을 살짝 긁히고 말았다.

민가를 나와선 뜨갈랄랑을 따라 페달을 밟았다. 그사이 정을 쌓은 자전거 동지들은 서로의 모습을 정성껏 찍어 주었다. 프랑스에서 여행 왔다던 아빠와 아들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무엇이든 아들에게 설명해 주고 싶은 말 많은 아빠와, 그런 아빠가 조금은 귀찮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사춘기 아들의 모습이 유쾌했다.

자전거 투어는 나시고랭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붓을 떠나는 N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인연이 되면 또 만나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절실했기에, 메인 스트릿에 도착하자마자 카페로 향했다.

<우붓 커피 로스터리>. DAY2에 요가를 함께했던 언니가 추천한 곳이었다. 문고리가 포타 필터로 되어 있는 것이 귀여워서, 입장하는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에어컨도 빵빵하고 무엇보다 커피 맛이 훌륭했다.

내일 우붓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 밤은 요가로 채우기로 했다. 택한 곳은 <루메리아 요가원>. 오픈한 지 오래되지 않은 곳인데, 풀 숲 사이에서 즐기는 명상 요가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명상 요가라서인지, 격한 동작이 많지 않아서 따라가기에 수월했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때였을까. 강사님이 편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으라고 했다. 벌써 사바아사나 시간인가, 했는데 웬걸. 둥둥 머리 위에서 징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한국인이 방문하면 무서울 수도 있다는 후기를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몸소 이해했다. 어둑해진 밤공기 사이로, 쉴 새 없이 울리는 징소리는 마치 굿 장단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징- 징-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몸과 분리된 정신이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청소기로 뇌를 빨아들이는 느낌이라면 이해가 될까.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도 버티기가 어려워 중간에 포기할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곧, 남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 끝을 보는 쪽으로 마음먹었다. 아까 자전거 투어에서 불편함을 외면했던 기억이 작용한 탓도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징소리가 끝나고, 모두 함께 둘러앉아 방금 전 경험에 대한 생각을 나눴다. 수강생 대부분 징소리를 들으며 편안하게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무서움, 혼란스러움, 그만두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끝을 보았던 것이다.


어떤 것들은 미련하게 참아서라도 끝을 보아야 하는 법이구나.   

개운함을 안고, 마트에 가서 망고스틴을 한 봉지 샀다. 휴대폰 배터리와 보조배터리 모두 방전 직전임을 발견했지만, 배터리가 없다는 이유로 서둘러 숙소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근사한 저녁이 먹고 싶었다.


3퍼센트 남아있는 휴대폰을 과감히 끄고, 근처의 립 맛집으로 향했다. 맛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검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사진을 찍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여행을 다녔다면 어땠을까. 길치인 나는 실시간 지도를 보지 못해 조금 더 험난한 여행을 했을 거다. 그치만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이를 만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되었다. 물론, 늦은 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랩을 잡지 못해 허둥대는 감정까지 겪고 싶지는 않다만.


이런저런 장황한 생각들로 마무리되는 우붓의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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