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오지 못한 것

DAY10. 길리 맛집을 탐방하다

by 셀미

마음도 짐도 가볍게 떠남을 추구하는 여행자이지만, 일상의 모든 걸 놓고 올 수 있는 건 아니다. 굳이 따라붙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어느새 몸과 정신에 멋대로 새겨져 버린 직업병이 그렇다.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방문하든, 무엇을 먹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속속들이 파헤치고,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것이 내가 8년간 몸담아온 직업의 일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버릇들이 있는데 과한 호기심, 습관성 리액션, 연속성 질문, 급한 성격 등이 그것이다.


일을 쉴 때도 문득문득 튀어나오곤 하는 이 '직업병'은 길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힐링만 취하고 싶을 땐 귀찮고 피곤한 존재였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행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든 보충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The beach house>로 숙소를 옮겼다. 항구 바로 앞 메인스트릿에 위치해 있어 지나다닐 때마다 눈에 띄던 곳이다. 호텔 수영장에 몸을 담근 채 거리 위 사람들을 구경하는 투숙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 이젠 내가 조식을 먹으며 그 모습을 재연하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겐 인상 깊은 모습으로 남았으려나.

길리에 머문 기간 동안 찍은 사진 중에는 자전거 자물쇠 사진이 유독 많다.


"비밀번호는 631이야."

"631, 631, 631. 631..."


입으로 몇 번이고 외워도 기억해야 할 때가 오면 어느새 새카맣게 잊어버리는 숫자 서너 개. 그래서 자전거를 빌릴 때마다 사진을 찍어 두었다.


메인 교통수단이 자전거인 섬이다 보니, 길거리 주차장엔 늘 여러 대가 줄지어 세워져 있다. 대부분의 자전거에는 중국발 공유 자전거 브랜드인 'OFO(오포)'가 새겨져 있는데 해당 기업은 파산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던 만큼 자전거 처리가 골치였을 텐데, 아마 그중 일부가 길리로 새어들어왔으리라.


자전거마다 구별을 위해 렌트사의 회사 이름과 번호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잘 보이지 않아 알콜까지 들어간 정신이라면 한참을 찾아 헤매야 했다. 이건가? 싶을 때 비밀번호가 맞지 않으면 아득해지는 것이다.

아지트가 된 <SUNRISE BREAKFAST>에선 먼저 도착한 동행들이 스노클링을 하고 있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 거북이를 쫓아 헤엄- 헤엄-. 한참 물놀이를 하다 보니 어느새 배가 고파졌다. 선베드에 누워 몸을 말리며 점심 메뉴를 고민할 때였다.


"물놀이하고 나서는 라면인데."

"분식 먹고 싶다."

"윤식당 여기 근처던데 가볼까?"

"거기 아직 운영해?"

길리가 한국인에게 유명해진 데에는 2017년 방영했던 프로그램 <윤식당>의 영향이 크다. 당시에 나도 방송을 보며 '천국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수많은 한국인 여행자가 천국을 찾아 몰려들었을 테고, 길리 호객꾼들은 그때 '안녕'과 '거북이'라는 말을 배웠을 거다.


그런 <윤식당>이 아직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프로그램 속 모습과는 달랐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를 모아 보니 방송이 끝난 후 한 한국인이 같은 자리에 리모델링을 거쳐 동명의 식당을 개업했고, 호텔도 함께 운영하고 있나 보았다.

해외여행 중 굳이 한식집을 찾아가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메뉴판에 한식 메뉴가 적혀 있으니 이것저것 다 먹고 싶었다. 그렇게 차려진 푸짐한 밥상. 음식은, 그중에서도 특히 라면은 외국인들의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 밍밍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었다.

한식을 먹은 덕일까. 동행들과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서로의 직업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행동에서도 '직업병'이 묻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미쉐린 총괄매니저로 일했던 C언니는 우리와 식사를 하는 중에도 테이블 위에 부족한 것이 없는지를 살폈고, 만약 있다면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직원에게 요청했다.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J오빠는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해 사진을 찍었고, 이후 한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 결과물을 인화해 나눠주었다. 잡지사에서 일하다 본인의 콘텐츠를 찾아 퇴사한 D는 여행 브이로그를 찍으며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해 내내 고민과 노력을 했다. 그리고 방송 제작 일을 하는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질문과 리액션을 퍼부었다. 그 조화가 재밌어서 내내 즐거웠다.

몸을 씻으려 호텔로 돌아가니, 앞에서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다. 워낙 여행자가 많이 다니는 곳이라 그런가, 길리에서는 어딜 가나 노래가 흘렀다. 장르는 대부분 올드락. 가장 많이 들은 노래를 딱 한 곡 뽑자면 단연 ABBA의 <맘마미아>다. 흥이 넘치는 길리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각자 휴식을 취한 뒤, <수미 사테>에서 동행들과 다시 만났다. DAY2에 들렀던 카페의 친절한 직원이 추천해 준 바로 그 맛집이다.


길리는 해변가 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지만, 중심부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울퉁불퉁 비포장 흙길이다. <수미 사테>는 그 중심부에 위치한 노상이었다. 가는 길이 꽤 험난해서 계속 '이 길이 맞아?' 되뇌며 페달을 밟던 기억이 있다. 겨우 가게에 도착하니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다가 포기할 뻔했어."


<수미 사테>의 대표 메뉴는 'Sate Ayam'과 'Bebaling Soup' 두 가지였다. 양념된 닭고기를 꼬치에 꽂아 숯불에 구워주는 사테 아얌과 갈비탕 같은 비주얼과 맛을 지닌 비프 숩. 손님은 현지인 아니면 한국인 여행자들이었는데 왜 유독 한국인들에게 입소문이 났는지 알 수 있는 맛이었다. 습-하 습-하 소리를 내가며 먹을 정도로 꽤 매웠는데, '엽떡'과 결이 비슷한 매운맛이었다. 처음 이 집을 발굴해 전파한 여행자는 누구였을까. 누군지는 몰라도 참 고맙다.

식사를 마치고 해변가를 향해 달려가는데, 때 아닌 교통 체증이 일었다. 골목길을 지나던 소 무리 때문이었다. 이끄는 사람이 없는, 그래서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예상할 수 않는 소들이 유유히 앞을 지나갔다. 어리둥절해 바라보다가 같은 표정을 한 동행들과 눈이 마주쳐 웃던 순간이 생생하다.

상 못한 마주침을 지나 도착한 곳은 첫날 들렀던 해변 시네마였다. 일정표를 보니 다음 주 수요일 상영작으로 <보헤미안 랩소디>걸려 있었다. 한국에서 상영할 당시 영화관에서 여러 번 봤을 정도로 좋아하는 영화였기 때문에 보고 떠나야 할지 갈등이 되었다. 해변 빈백에 누워 라이브에이드 장면을 본다면 얼마나 끝내줄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결정을 유보길 택했다.


"그때 가서 다시 고민해야지."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 일상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장 피해야 하는 행위다. 현장이 닥치기 전에 확실한 결정을 해두기 위해 수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하며 수많은 회의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가면, 미처 예상치 못한 변수들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엉켜 있는 매듭을 풀듯 하나씩,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며 변수를 해결해 나가는 그 짜릿함이 일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여행에서의 즉흥성을 즐기는 것' 역시 미처 일상에 두고 오지 못한 '직업병'일까. 의문을 안은 채 길리의 하루가 또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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