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각을 깨워 준 외숙모의 고추 무침과 좁쌀 밥

by Thankfulness


어릴 적 나에겐 외삼촌이 4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첫째 외삼촌 댁은 시골에 있어서 벼농사도 짓고, 밭도 가꾸셨다. 밭엔 주로 고추를 심어서 수확할 때 종종 따라가기도 했는데, 줄기를 곧게 세우기 위해 줄기와 함께 묶어 세운 나무 막대기 위엔 잠자리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따라간 나와 다른 사촌들은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느라 살금살금 발꿈치 들고 조용히 다가가 날개를 잡기를 반복하며 고추밭 이리저리 다니며 우리는 너무 즐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는 집 주변엔 잠자리 한 마리 구경하기 힘든데 그곳엔 끝이 빨간 고추잠자리, 그리고 파랗고 노란 이름도 모르는 신기한 잠자리들이 너무 많았다. 잠자리를 잡아 손가락 사이사이 날개를 끼워 가지고 와서는 박제를 한다고 알코올로 소독하고 핀으로 꽂아 액자를 만들었던 것은 우리들 방학숙제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러면 박제를 하면서 잠자리 종류를 적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찾아서 노란측범잠자리, 장수잠자리, 넉점박이 잠자리, 날개띠좀잠자리 등등 참으로 재미난 이름이 붙여진 잠자리들의 종류를 알아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삼촌댁에 갔다가 잡아온 잠자리로 만든 나의 박제는 선생님의 다음 학기 교재로 쓰이곤 했다.


삼촌이 살던 집을 떠올려 보면......

처음엔 대문도 없고 낮은 담장만 있었던 것 같다. 한참 후에 소를 도둑맞은 이후로 담장이 높아지고 커다란 철 대문도 생겼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집이었다. 마당 한편에는 소가 2마리? 3마리? 정도 있었고, 집 뒤로 가다 보면 보리수나무와 옻나무가 같이 있어서 보리수 따 먹다가 옻이 올라 온몸이 가렵고 벌겋게 벌집처럼 된 적이 있다. 가렵고 진물나고 엄마가 무슨 가루도 뿌려주고, 약도 발라주고, 특별한 소금물 같은 걸로 닦아 주시기도 했다. 정말 힘든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다음번에 다시 가면, 난 그 보리수의 유혹을 견뎌내지 못하고, 또다시 정말 조심조심 손을 뻗어 보리수를 따먹던 기억이 난다. 나도 그렇게 천진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였던 적이 있었구나. 가슴 뛰는 기분좋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 옆에 집과 떨어져 단독으로 지어진 방이라 할까? 넓은 방이 있었는데 그곳엔 메주들이 놓여있었다. 뜨겁게 아궁에 불을 지펴, 문을 열면 더운 열기가 확 느껴질 정도로 뜨거운 구들장에 메주를 놓고 띄운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때는 처마밑에 모두 메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어느 때는 감, 옥수수 이런 것들이 매달리도 했었다. 조금 더 뒤로 가면 우물도 있어서 두레박으로 우물을 퍼 올려보는 신기한 경험을 하며 콩쥐 팥쥐 이야기를 떠올린 기억도 생생하다. 그 당시 듣는 동화로 콩쥐팥쥐 이야기를 열심히 듣던 때였다. "어머나, 독이 깨졌네... 이를 어째" 하고 콩쥐가 울면, 어디서 두꺼비가 나타나 독을 막아주어 깨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깨진 독에 당연히 물을 안 채웠을 줄 알고 혼낼 준비하고 온 새엄마는 그런 콩쥐가 더욱 미웠다는 내레이션도 너무 생생하다. 이런 이야기를 요즘 애들도 아는지 모르겠다. 또한 그 우물 안이 너무 깊어서 아래를 쳐다보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은 그 우물은 없어지고 옛날 수동식 펌프가 생겨서 힘겹게 거의 온몸을 싣다 싶게 해서 몇 번을 하는 게 참 힘들어서 이게 뭐야 하는 순간, 물이 콸콸 나와서 깜짝 놀란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물은 정말 차가웠다. 그런 물로 삼촌과 오빠들은 등물이라는 걸 자주 하곤 했는데 난 보기만 해도 그 차가움이 내 몸에 닿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삼촌도 차가움을 참아가며 연신 어푸어푸~~ 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까르르 넘어가곤 했지.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행복한 추억이다.


삼촌댁에는 항상 동네 사람들이든 가족들이든 사람들로 북적였고, 엄마가 항상 삼촌 칭찬을 하셔서 내 기억 속에 더욱 좋으신 분으로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의 눈에도 외삼촌은 외모가 수려하고 커다란 눈이 너무 선해 보이시는 모습이셨고, 왠지 이 시골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어릴 적 제법 자주 삼촌댁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갈 때마다 내가 밥을 너무 맛있게 먹으니 나를 엄마가 삼촌댁에 혼자 며칠을 더 있게 한 적도 있다. 집에서는 밥을 너무 안 먹어서 엄마가 매일 이것저것 내가 먹는 것을 찾아 해 주시곤 했는데, 외삼촌 댁에만 가면 밥을 너무 잘 먹으니 밥을 좀 먹여서 보내라고. 아니면 엄마 없이 지내보라고? 엄마 마음속엔 좀 서운함이 있지 않았을까? 늦둥이 막내 키우시면서 어디 나가셨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간식거리 꼭 사들고 오셔서 맛있게 먹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엄마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런 엄마에게 외삼촌 댁에 갈 때마다 집에서 보다 훨씬 밥을 잘 먹는 이 막내딸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셨을까? 더구나 우리 딸이 밥을 너무 안 먹는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하곤 하셨는데 삼촌댁에 가기만 하면 너무 잘 먹으니 엄마가 좀 당황스럽기도 했으리라는 생각을 이제야 해 보게 된다. '흥, 이 녀석이 그토록 정성 들여 밥을 해줘도 잘 먹지도 않더니.. 에이고... '하지 않으셨을까? 내 딸이 내가 해준 밥은 잘 안 먹으면서 다른 사람이 해준 음식을 너무 맛있게 먹는다면 나는 너무 서운했을 것 같다. 그렇게 외숙모가 해 주시던 모든 반찬이 맛있었지만 이상하리 만치 다른 음식은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과 같이 모여 하하호호 웃음꽃 피워가며 먹는 밥이 그 무엇이었든 맛있지 않았을까? 집에서 혼자 먹는 산해진미보다도 말이다.


하지만 외숙모의 음식 중에서 잊히지 않는 음식이 있다. 삭힌 고추 무침과 좁쌀밥이다. 밥 짓던 그 부엌을 떠올려 보면, 바닥이 흙 같았는데 단단하게 다져 저서 매끈한 돌을 놓은 듯 올록볼록했고, 왼쪽 한편에는 장작 더미가 쌓여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3개의 아궁이에 각각 커다란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그 등 뒤에는 찬장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건 턱이 꽤 높은 곳 위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부엌 구조에서 어떻게 밥을 매번 잔치 치르듯 하셨을까 싶다. 전은 어디서 부치셨을까? 칼질은 어디서 하셨을까? 설거지는? 밖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부르면 와서 밥 맛있게 먹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었으니 그 음식을 어떻게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 해 농사지은 햇좁쌀과 햅쌀로 가마솥에 장작으로 불을 지펴 지은 밥은 찰밥처럼 찰지고 윤기가 자르르 흘렀으며, 그 햅살의 고소함과 좁쌀의 작은 알갱이가 간혹 찰진 밥과 엉겨 붙어있지 않고 낱알이 혀를 돌아다니다가 같이 엉기는 그 재미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직접 기르신 고추를 삭혀서 그 삭힌 고추를 무치셨는데..... 그 맛을 지금처럼 물엿과 고춧가루 넣고 무쳐 삭힌 고추의 새콤함과 물엿의 달콤함을 상상하면 안 된다. 무슨 된장 같은데 정말 특이했다. 된장에 고추장을 섞은 맛도 아니고 그냥 된장 맛도 아닌 것이 너무 특이해서 그 어린 나이에도 엄마한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이 무슨 된장이냐고. 그때 엄마가 집장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걸 기억한다. 어린 내 기억 속에 약간의 메주 냄새 같은 것이 났고, 고추장이 아니고 뭐 좀 그 비슷한 것이 섞인 느낌인데 고추에서 나오는 새콤함과 어울려 간이 너무 잘 맞아서 더욱 맛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따뜻한 가마솥 밥에 삭힌 고추를 한입 물면, 집장의 짭짤하면서 구수한 그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며 삭힌 고추에서 나오는 새콤한 물이 혀에 닿아 어울리고 씹히는 과정에 작은 좁쌀이 혀를 구르다 같이 씹히던 그 기분 좋은 맛에 대한 그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어린 마음에도 이렇게 맛있는 집장을 외숙모한테 좀 얻어가지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난 그 맛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무슨 때마다 모든 집안 식구들이 그 집에 모여 먹고 자고 가기도 하고 그러니 집장인들 아니면 그 어느 식자재인들 항상 많이 필요했을 것이요, 그 많은 사람들의 매 끼니를 챙기며 애쓰는 올케에게 그 집장을 달라고 하기 힘들었으리라. 아니면 혹시 이 막내딸이 얄미워서? 그렇게 엄마는 집장 좀 싸 달라는 말을 한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밥을 하고 나면 아궁이 3개에 지핀 불은 온돌방을 그야말로 끓게 했다. 어린 기억에 너무 뜨거워서 두꺼운 솜요 위에 있지 않으면 발도 디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 어릴 절 잠버릇이 그렇게 고약해졌나 보다. 어릴 적엔 우리 집도 온돌이었으니, 자면서 내 몸이 자꾸 차가 온 곳을 찾아 헤매어, 분명 잠은 제일 안쪽에서 잤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면 문 앞에 코를 데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런 건 다만 내 모습만은 아니었다. 사촌 동생들과 한두 살 많은 언니. 오빠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어둑해질 무렵엔 쥐불놀이를 한다고 깡통에 뭔가를 넣어주고 돌리라고 해서 돌리다 내 뒤통수를 맞고는 울고 들어오면 영락없이 우리 모두를 데리고 나간 사촌 오빠가 따라와 변명하느라 바빴고, 불장난하면 밤에 오줌 싼다고 하여 그다음 날엔 얼른 일어나 이불 먼저 들춰보곤 했다. 이 모든 것이 외삼촌댁에 가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릴 적 외삼촌댁에 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을까... 밥이 어찌 맛이 없을 수가 있었겠나...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나는 그 고추무침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외삼촌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외숙모와 가족들은 조금 더 큰 도시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이사를 가시고 나서 외삼촌이 안 계신 숙모 댁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아마도 외삼촌 계실 때 너무 많은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 삼촌 친구들 오면, 먹이고 재우고 하시느라 너무 힘드셨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을 선물한 외삼촌댁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 집장 맛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집장 비슷한 맛도 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아니었는데, 그 맛이 이토록 생생하다니... 나의 조금 다른 미각을 깨워준 것은 외숙모의 고추무침이 아니었을까?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내가 얼떨결에 식당도 시작하게 되어 5년 조금 넘는 기간을 해내고, 지금도 맛난 음식 먹어 보고, 먹고 집에 와서 해보는 게 취미이고, 몇 번에 걸친 발효로 3-4시간은 족히 걸리는 빵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하는 나의 미각을 깨워준 것은 그 덕분이 아니었을까?


고추무침과 좁쌀밥 생각하다 보니 이 모든 추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각이 났다. 이사 가신 외숙모와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나중에 엄마와 통화하게 되면 여쭈어 봐야겠다. 내 어릴 적 추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어드벤처를 제공해 주신 외삼촌 내외분께 감사인사 한번 못 드린 것이 내내 후회로 남을 듯하다. 엄마한테 가게 되면 외숙모라도 한번 뵐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그때 외숙모의 모든 음식은 최고였고, 숙모의 고추무침은 내 인생의 최고의 음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사용된 사진은 출처가 Google search로 얻은 결과임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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