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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신화의 예술

이집트 회화

by 미키

중학생 때 이집트를 배경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내용의 <왕가의 문장>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멤피스라는 왕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집트 왕과 현대 세계에서 과거로 거슬러 온 여학생의 만남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멜로 역사 판타지 만화였죠. 무엇보다도 이집트가 상상력과 모험 가득히 채워진 곳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서 어쩌다가 한국에 이집트 유물이 왔다는 기사만 보면 온 마음이 설레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눈에 시끌벅적하게 열린 전시회에서 투탕카멘의 데스마스크(death mask)는 휘황찬란한 고국의 역사를 자랑했고 왕실에서 사용한 유물과 신분을 증명하는 이집트인들의 패션은 흥미로웠습니다. 화려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진 왕족들의 무덤인 피라미드 사진과 장식품들로 재현한 의복들을 보면서 만화책 속에서 봤던 이집트 왕족의 패션을 비교하면서 심오하게 전시를 관람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억 속에 이집트 전시는 화려했습니다. 이집트 미술 회화 속에서 보이는 일률적인 표현 방법과 도제 형식으로 전해지는 엄격한 룰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나지 않았죠. 저는 그렇게 이집트 미술을 화려한 황금 예술 세계로 기억했기에, 대학에서 이집트 미술사를 접했을 때는 어리둥절해했습니다.




규칙1. 아는 것을 그린다.


교수님은 차분한 어조로 미술사 내용을 설명하셨고 우리는 스크린 화면에 띄워진 PPT화면을 바라보면서 동일하게 생긴 인물의 얼굴과 발은 측면으로 그려야 하고 어깨와 몸통은 정면으로 그려야 했다는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대종소라고 하는 당시 사회적 직위에 따라 인물의 크기를 다르게 그려야 했던 규칙도 중요했죠. 왕과 신하가 있는 장면은 왕은 크게, 신하는 작게 그리고, 왕과 왕비를 그릴 때 역시 왕은 크게 왕비는 작게 그리는 ‘주대종소’의 원칙을 철저하게 따랐음을 동양 서양을 막론하고 동일했다는 사실은 역사화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릴 수도 없고, 그리는 방법을 엄격하게 사수로부터 전수받아야 했으며, 또 그걸 그대로 적용해서 그려야 했다니! 교수님의 강의가 끝나면 책을 정리하면서 툴툴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각나네요.


이집트 예술 세계의 가치관은 “잘 이해할 수 있게 그리는 것”, “최대한 많은 특징을 담아내는 것”을 철칙으로 따랐습니다. 얼굴 측면의 라인으로 코와 입술도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특징이 명료하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발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로 정면보다 측면이 발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그렇게 이집트 미술은 각 신체 부위에서 가장 특징적인 모습들을 조합해 잘 이해할 수 있게 정보 전달을 극대화하는 시각적 문법을 추구했습니다.






규칙2.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것.


일찍이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발견하고 건축에 적용하고 체계화했던 선원근법은 마사치오(Tommaso Masaccio, 1401-1428)가 회화 속에 적용하여 환영적 공간감을 만들 냅니다. 소실점과 투시도법이 적용된 공간은 물리적으로 막힌 벽이지만, 저 깊숙이 빠져들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그러니까 감상자의 위치를 기준으로 한 소실점을 중심으로 공간을 배치하는 기법으로 깊이감 있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성 삼위일체 1428

그러나 고대 이집트 예술가들에겐 선원근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사실대로 그리고자 하는 개념보다는 아는 것을 그리고자 하는 관념적 사상이 더 중요했죠. 사실적 묘사에는 관심이 크게 없었습니다. 특히 내세사상이 강했던 이집트인들에게 예술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는 도구였고, 아는 것을 최대한 많이 담아내어 전달하는 그림이 좋은 예술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집트 미술을 볼 때 처음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감상하곤 합니다. 일단, 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새와 나무들의 형태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 연못 속에 있는 물고기는 어떤 모양으로 그려야 할지 등등 혼란스러움을 느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려야 할 대상들이 너무 많이 겹쳐져 있고 심지어 연못 안에 물고기는 잘 보이지도 않죠. 더 큰 어려움은 종이 위에 연필로 스케치를 해야 하는데, 고개를 들어 눈으로 들어오는 공원 풍경을 보고 기억하고 다시 고개를 숙여 종이 위에다가 옮겨 그릴 때마다 보는 위치, 각도에 따라 형태가 자꾸 달라지니 도대체 어떤 모양으로 그려야 할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버럭)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 부족하다면 화가 날만한 상황이지 않을까요? 고대 시대의 예술가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느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 문제를 크게 어렵게 다루지 않았던 거 같아요. 자연에 적응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고대인들답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대한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바로, 아는 것들을 그리면 된다는 사실. 이 유용한 방식이 당시 회화의 혼돈과 어려움을 방지할 수 있었고, 종교적 전통과 내세관이 형식주의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중앙집권화 왕권 체제를 강화하는 엄격한 형식주의가 탄생됩니다.



새로운 시대, 이크나톤.


이러한 정통성과 엄격성을 고려해야 했던 이집트 예술 세계에 개성을 담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움도 있었습니다. 바로 이 크나 톤 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이집트 예술은 전통적인 형식주의에서 탈피하는데요.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달라는 이 크나 톤의 예술적 가치관 덕분에 실제로 이크나톤을 묘사한 왕의 조각상은 실제 고대 이집트인들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게 만듭니다. 길쭉한 얼굴형과 툭. 튀어나온 입, 그리고 늘어난 뱃살까지 더해 그야말로 이크나톤의 왕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시각적인 자료로 완벽합니다.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 회화 영역의 예술작품에서도 밭을 가는 익살맞은 표현과 인체의 동작 표현이 자유로우면서도 개성 넘치게 완성했죠. 이러한 표현 방식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고 무엇보다도 이집트 예술인들의 실력을 왕성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복잡합니다. 예술은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지만, 이 크나 톤의 개방적 표현 방식은 왕권을 상징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신하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게 되죠. 이 크나 톤은 서른 살 나이로 단명하고 사후에 중앙집권화 체제로 돌아갔고자 했으나 잠시 회복되는 듯하다가 역사의 쇠퇴 길로 가게 됩니다.





위대함과 정통성으로 그 엄격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집트 예술. 그 화려하고 오랜 세월의 역사적 기록은 이집트 예술의 형식주의 가치 덕분에 유지되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이크나톤 시대는 이런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고,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미술적 시도가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혁신이 반드시 긍정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체제와의 조화를 이루거나, 혁신 자체가 새로운 정통성을 창출해야 함을 알게 하죠. 이집트 미술이 수천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질서를 담보하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혁신은 무엇이며, 그것이 기존의 정통성과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혁신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새로운 가치를 정립할 수 있을 때만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집트 미술의 역사기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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