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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정체성을 담은 예술가

Alfred Otto Wolfgang Schulze (볼스)

by 미키

오후 2시 일반 직장인과 다른 프리랜서의 퇴근. 점심을 먹기 위해 혼자서 바닷가 선술집을 찾았습니다. 일본식 닭튀김과 하이볼 한 잔을 주문하고, 문 바깥에서 토톡토톡 떨어지는 빗소리가 분위기 있게 좋았습니다. 하이볼 한 잔이 먼저 나오면서 시원한 목 넘김과 달달하고도 취기가 살짝 도는 알코올의 짜릿함이 뒤섞여 그야말로 가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게 분위기 좋은 빗소리를 음악으로 들으면서 잔잔한 바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엉뚱한 질문이 생각나더군요.


"만약 신이 나에게 다시 10대로 돌아갈 기회를 준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가게는 한산했고, 주인은 초조한 듯 전화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한편 젊은 요리사 직원분이 제 맞은 편에 서서 은근슬쩍 말을 걸고 싶은 눈치를 보였죠. 망설였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습니다.


"이 시간에 사람이 별로 없네요. "

용기 있게 시작된 대화였지만, 생각보다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심한 식사 시간이 아니어서 나름대로 나쁘진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흠. 일단은 망설일 거야. 아쉬움이 있긴 하니까. 그러나 거절할 거야. 20대로 돌아가게 해 준다 해도 거절할 거야. 과거와 똑같은 환경으로 갈 거라면." 어느 나라에 태어났는지, 어떤 부모님에게 태어났는지가 중요한 현실적 문제 이긴 하지만, 이 전부가 제 과거와 동일한 조건이라면 다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길래 이렇게 일찍 퇴근하세요? 뭐 하시는지 물어봐도 되나요?"라는 낯선 직원의 질문을 받고 생각에서 깨어나보니 이 순간이 제일 좋다고 느끼는 지금이 제일 괜찮은 거 같아 보였습니다. 내일은 내일의 그 순간이 가장 좋을 것이고, 다음 날은 그날의 그 순간이 좋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저에게 지금이 가장 좋다는 건 당연한 믿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냥 저는 최선을 다해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 일념으로 살았던 기억을 더듬어 직원 분에게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뇨. 물어보지 마세요. "




고통의 시간, 그리고 앵포르멜


20대는 젊음만큼이나 절망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혹독한 시절의 겨울이었기에 저는 그때를 생각하면 사람 온기 하나 없는 세상이었고,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손발이 시리도록 차가웠는지. 그 시간 속에서 홀로 모든 걸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말인지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어쩌면 자기 인생을 100% 만족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0.1%의 후회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요? 저 역시 젊었을 때 너무 힘드니까 후회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무기력함 때문에 힘들었죠. 지금은 그때의 제 슬픈 기억들을 위로해 주는 예술 세계가 있습니다.


앵포르멜 예술가들 중 한 명인 볼스 <Alfread Otto Wolfgang schulze, 1913~1951)입니다.


'oui, oui oui', 1947


볼스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감금된 경험이 있습니다. 불스의 작품을 볼 때면 나치가 불러온 전쟁과 잔인한 고통 속에서 자기의 실존적 의미를 찾고자 남긴 경험이자, 기록이라고 느낍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싶지 않아서 시커먼 물감을 캔버스에 덕지덕지 처바르다시피 했습니다. 붉은 선으로 어지럽고 거칠게 그어진 선들은 폭발할 듯한 내면의 고통을 느끼게 하죠.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상황을 고려하면 '물질' 자체로 부각하는 작품은 개인적으로 제 마음이 울리는 무언가가 담겨 있습니다.


볼스는 타시즘(tachisme)이라 불리는 명칭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요. 얼룩을 의미하는 '타시'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두꺼운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서 만든 얼룩과 같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입니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해 표현했다기보다 거친 얼룩과 휘갈긴 선들의 충돌이 매우 강렬하고 직관적입니다.



'unknown title', 1940s



저는 볼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항상 두 가지 생각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첫째, 고통에 찬 과거의 기억들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런 작품으로 남는다.

둘째,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많은 것들은 복잡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it's all over - the city', 1947


어느 날부터인가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로 폭발하는 듯한 강렬함 힘이 연상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새로운 출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그러진 형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무정형 속에서 폭발할 듯한 강렬한 힘을 느끼죠. 고통과 좌절의 눈물이 남기는 것은 마음의 상처인 듯 해보이나,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오늘 살아가는 각자의 삶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가 담겨 있다고 믿게 되는 것. 바로 앵포르멜 작품은 '승화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상처를 겪고, 혼돈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혼돈이 반드시 끝나야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혼돈 자체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본질일 수도 있습니다. 형태를 잃은 것처럼 무너진 것 같아도, 볼스의 작품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희망을 상징합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 실존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는 것에 위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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