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Beuy (요셉 보이스)
'나는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순간적으로 비행기가 불타며 추락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후의 기억이 섬광처럼 번쩍이며 사라졌다. 붉은 하늘, 급속도로 다가오는 대지, 그리고 충격.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낯선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살아온 장면과 달랐다. 녹색 숲과 어우러진 대지를 걷고 있지만, 몇 걸음을 떼면 지형이 변했다. 나무가 흔들리는 방향이 역행했고, 발밑의 흙은 마치 숨 쉬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몸이 이상하게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상을 입었을 터인데, 통증이 없었다. 피가 흘렀어야 했는데, 말끔했다.
기이한 형체의 인간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회색빛의 가죽을 두르고 있었고, 눈은 깊숙이 들어가 빛을 반사했다. 그들은 말 대신 기묘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마치 대기가 직접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살아있다."
그 말이 나의 뇌 안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이질적인 새로운 세계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타르족은 나를 끌고 자신들의 거처로 향했다. 거처라기엔 마치 환영 속에 존재하는 공간 같았다. 그들은 알 수 없는 물질로 나를 덮었다. 그것은 차갑고, 부드러웠으며 동시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방덩어리로 내 피부를 감싸고 펠트로 붕대처럼 빙빙 감았다. 지방덩어리가 몸에 점차 녹아들듯 스며드는 감각을 느꼈다. 뼈가 원래 자리로 맞춰지고, 찢어진 살이 재생되었다. 하지만 그리 단순한 치유가 아니었다. 고통에 나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은 나의 기적적인 생환을 축하했다. 내가 타타르족에게 구조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나는 기괴한 꿈이 현실이었던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내 피부를 덮은 지방덩어리, 그 감각, 그리고 그의 몸속에 남은 이질적인 존재의 속삭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분명 느끼고 있었다.'
<비행과 구원의 신화> 내러티브는 20세기 개념미술의 거장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위해 구축한 창작 신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보이스가 경험한 비행기 추락 사고를 바탕으로 하지만, 타타르족에 의한 구조와 치유는 그가 의도적으로 창조한 예술적 내러티브라는 바탕으로 제가 다시 각색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대학시절 미술사 강의 중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물론 제가 더 허구적으로 덧붙여 만들었지만, 요셉 보이스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뒷받침해 줄 중요한 클리셰가 되어줄 이야기가 필요했고 바로 이 타타르 족을 선택하여 실제로 겪은 비행추락사고의 경험과 연결하여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앞서서 내러티브로 전개한 이야기 속에는 '지방 덩어리를 몸에 두르고 펠트로 감싸 안는다.'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방(Fat)과 펠트(Felt)는 요셉 보이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개념으로 각각의 속성을 상징적인 의미로 정의 내립니다.
지방(Fat)은 변화 가능성을 상징합니다. 지방은 온도에 따라 액체에서 고체로, 또는 그 반대로 변할 수 있는 물질입니다. 이러한 가변성은 보이스에게 예술과 사회의 변화 가능성, 그리고 인간 의식의 유동적 특성을 나타내는 메타포가 되었습니다. 펠트(Felt)는 보호와 치유를 상징합니다. 타타르족 신화에서 보이스의 몸을 감싸고 보호했던 소재로, 그의 작품 세계에서 사회적 상처의 치유와 보호의 은유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알고 요셉 보이스의 작품을 감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코요테: 나는 미국을 사랑한다, 그리고 미국도 나를 사랑한다》(Coyote: 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 1974) 퍼포먼스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직접 펠트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로 3일간 코요테와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면서 교감하는 내용입니다. 코요테는 미국 원주민 문화에서 중요한 상징이자, 유럽 정착민에 의해 근절 대상이 된 동물입니다. 보이스가 코요테와 함께 한 공간에 머물며 신뢰 관계를 구축해 가는 과정은 서구 문명과 원주민 문화 간의 단절된 관계를 치유하고자 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는 미국 땅을 밟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실천하기 위해 벌인 이상한 행보를 보여준 일입니다. 그는 뉴욕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들것에 실려 구급차를 타고 바로 레네 블록 갤러리(René Block Gallery)로 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갤러리에서 살아 움직이는 코요테와 함께 3일을 지내는 퍼퍼먼스는 상당히 섬뜩한 긴장감을 불러옵니다. 그만큼 미국사회와 원주민(인디언) 사이의 갈등은 예민하고 굉장한 긴장감이 서려있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였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고 관심갖게 만들었죠.
《지방 의자》(Fat Chair, 1964)의 작품은 지방 덩어리의 의미를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의자는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하고 중요한 가구입니다. 서구 사람들은 오랫동안 의자에 앉는 좌식 문화가 있어왔기 때문에 삶에서 몸에 닿는 깊숙하고도 친밀한 존재이기도 하죠. 그렇게 불변하는 존재, 의자 위에 놓인 지방덩어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내리고 그 형체가 사라집니다. 가변적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자와 지방의 대조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전달합니다. 이 작품은 예술이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벽에 박제된 예술품에서 탈피하고 변화의 개념을 실제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개념미술의 본질은 요셉 보이스의 예술적 철학과 깊게 이어집니다.
저는 인상 깊었던 전시 리플릿(도록)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2008년 요셉보이스의 회고전으로 열린 <예술가-숭배-보이스(Cult of the Artist;BEUY. We are the Revolution)> 전시입니다. 18년 소장 중인 이 리플릿의 전시는 정확히 베를린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예술가-숭배-보이스> 전시의 에디션 작품전이었습니다. 150점가량의 작품들로 소소하게 큐레이션 된 전시가 이화여대 박술관으로 이어져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때 학교를 다니던 제가 만난 전시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펠트 수트》(Felt Suit, 1970)였죠. 저에게 그의 예술 세계는 어딘가 낯설고도 친숙한 이중적 감성이 느껴졌습니다. 동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는 자아가 서구 문명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작품과 마주친 느낀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면접을 보러 갈 때나 직장에 갈 때 깔끔한 수트(suit)를 입고 갑니다. 프로페셔널하고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죠. 이처럼 상대방에게 보이는 정서적 인지의 많은 것들이 옷에서 비롯된다고 알 수 있는데요. 옷은 우리의 사회적 문화를 상징하는 코드입니다. 그렇게 수트는 서구 문명의 사회적 역할과 관계된 옷입니다. 그 옷을 보호와 치유를 상징하는 펠트로 만들어서 걸어놨다는 사실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에다가 그의 신화적 재료 즉, 펠트를 결합하여 새로운 인간상을 제안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전시회에서 만난 요셉 보이스의 작품은 내러티브의 감각과 순수성을 개념 미술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요셉 보이스는 직접 만든 타타르 족의 신화 이야기와 펠트 수트에 자신이 부여한 상징성이 타당성을 얻어 하나의 예술품이 되었습니다. ‘펠트와 지방’이라는 소재 자체보다 그 소재에 부여된 상징성과 내러티브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단순한 오브제가 맥락이 결합된 서사적 구조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요셉 보이스는 타타르족 신화를 만들어 ‘펠트와 지방’의 의미를 창조하고자 했던 것이죠.
개념미술(Conceptual Art)은 단순한 시각적 형태가 아니라, 아이디어와 개념이 작품의 핵심이 되는 예술 형식입니다. 우리가 이야기가 있는 브랜드에 흥미를 갖는 것처럼 이야기를 통해 예술품의 정체성과 가치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그가 만들어 전해 준 타타르족의 신화에 매우 흥미로운 관심을 갖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접근법은 우리에게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니까요
요셉 보이스의 예술은 묻습니다.
당신은 어떤 내러티브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또 변화시키고 있나요?
" Kunst ist Leben, Leben ist Kunt"
"예술은 삶이며, 삶은 곧 예술이다."
-Joseph Beu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