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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Oct 18. 2020

00:00 Zero O'Clock

그런 날 있잖아 이유 없이 슬픈 날
몸은 무겁고 나 빼곤 모두 다 바쁘고 치열해 보이는 날


 지난달에 읽었던 책 중에 할 엘로드의 <미라클 모닝>이 있었다. 이미 주변에서 미라클 모닝 루틴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간증 후기에 나도 언젠가는 한 번...? 하고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의욕에 불타 이틀 만에 책을 독파하고 다음날부터 새벽 기상 루틴을 시작했다. 9월 마지막 주, 나의 평균 기상시간은 새벽 5시였다.


 아이들이랑 스물네 시간 부대끼는 삶. 그 가운데 내가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만의 소소한 목표와 욕심이 있었다. 매일 적어도 30분 이상 운동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싶었고, 또 비슷한 시간만큼은 어학 공부에 투자해서 단어도 외우고 외국어로 책도 읽고 싶었다. 10분 정도는 아이들이 없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명상을 하고 싶었고, 적막한 공간 속에서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일기도 쓰고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차근차근 나만의 시간을 쌓고 싶었다. 그 매일매일의 총합이 차곡차곡 쌓여 만든 정직한 습관과 실력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아이들이랑 붙어 있는 시간에는 육아와 집안일에 치여 그 시간을 제대로 확보하는 게 에베레스트 등반만큼이나 어려웠지만, 새벽 기상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고 싶은 그 날의 목표를 다 채웠는데도 아직 평소 기상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아 있었을 때, 그날 아침에 느꼈던 희열은 대단했다. 나는 이 새벽 기상과 모닝 루틴을 꾸준히 지속해서 꼭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10월 중반이 넘어선 지금, 나는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새벽 기상이 습관으로 자리잡기 전에, 그날 아침에 불타오르던 의욕은 소리 소문 없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그날의 희열과 다짐은 어디로 갔을까?




 새벽 기상을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이른 취침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겠다고 무턱대고 수면시간을 줄이다가는 오히려 일상이 무기력해지기 쉬우니 적어도 7시간 이상의 취침시간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자면 아이들을 재우는 9시 전후에 나도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원래 아이들이 잠들고 난 그 이후의 시간은 '육퇴' 후 꿀 같은 자유시간이었다. 드라마도 보고, 예능도 보고, 가끔은 맥주 한 잔도 곁들이는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드는 대신 자정 무렵의 넷플릭스 시청시간을 좀 더 생산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새벽으로 돌려 쓰기로 했다. 선물 같은 새벽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내일 아침을 기대하며 아이들 옆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4살 막내의 낮잠을 재우다가 옆에서 그만 같이 깜빡 잠들어버린 날이었다. 오후 서너 시경에 낮잠을 한 번 자고 난 나의 뇌는 정말 청량하고 맑아서, 아무리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도저히 뇌파가 수면파로 바뀌지 않았다. 시계 초침 소리만 들으면서 어둠 속에서 아까운 시간을 둥둥 흘려보내다가, 문득 이렇게 피곤에 찌들지 않은, 머리가 맑고 상쾌한 한밤중의 자유시간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 거란 생각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부터 미뤄놨던 글도 하나 발행하고, 읽고 싶었던 두꺼운 전공서도 술술 읽히던 밤이었다. 그날 자정까지 말 그대로 '꿀 같은'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이렇게 늦게까지 깨어있었으니 내일 새벽 기상은 안 되겠다며 시계 알람을 껐다. 한밤 중에 지적 활동에 집중했던 나의 뇌는, 조금 전까지 CPU를 풀가동했던 하드의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지 여전히 너무 맑고 청량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새벽 1시가 넘어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런데 한 번 기상시간이 뒤로 후퇴하니 다시 앞당기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이에 폴란드의 날씨는 갑작스럽게 겨울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매일 비가 오고 하늘이 흐리멍덩한, 나를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그 날씨로 변해 버렸다. 한창 활동적이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낮 동안에 흐린 날씨 속에서 시간 감각 없이 살다 보니 모든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며칠을 그렇게 어영부영 보내다가 하루는 있는 의욕 없는 의욕 다 끌어들여 다시 시계를 맞추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까지 성공하였으나.... 새벽은 너무 어두웠고, 추웠고, 그리고 외로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시간이라 느꼈었는데, 왜 그게 외로운 시간으로 바뀌어버린 걸까.


 그날 아침에는 마음이 너무 허망하고 허전해서 눈 앞에 있는 찻잔만 멍하니 쳐다보다가 계획했던 루틴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우울했고, 아이에게는 짜증을 냈다.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 하루를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고작 아침 일곱 시에 하루를 망했다고 단정하는, 깊이 어두웠던 마음. 이게 무슨 '미라클 모닝'인가. 결심이,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이렇게 짜증을 낼 거면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새벽에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았다. 섣불리 무언가 시작하기에 앞서, 마음의 힘을 더 다져야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냥 이 우울의 시기를 무사히 흘려보낼 수 있도록 그저 기다려야 했다.  



 새벽 기상을 내려놓은 이후로 나의 취침 시간은 다시 자정 이후로 후퇴했다. 밤의 자유시간은 소극적이다. 너무 활동적인 시간을 보내면 막상 잠을 청했을 때 불면의 괴로움과 싸우며 이불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만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 잠을 잘 자야 다음 날 하루를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시작할 수 있으니 최대한 정적이고 조용한 활동들로 그 시간을 채운다. 유산소 운동 대신 요가, 글쓰기 대신 글 읽기, 그리고 영상을 보는 대신 눈이 쉴 수 있도록 오디오북을 듣거나 음악을 듣는다.


 가뜩이나 무기력한 시기에 에너제틱한 활동들이 일상 속에 스며들지 않으니 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성에 차지 않는 자유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이 답답했다. 그럴 때면 지난 몇 주간의 활기찼던 아침이 떠올랐다. 모닝 루틴을 끝내고 뿌듯한 마음으로 창 밖이 환해져 오는 것을 바라보았던 날, 그 날의 희열이 그리 오래 전도 아니었는데 남의 이야기만 같았다.





 그런 답답한 마음을 한 구석에 묻어두고 있던 어느 날, 자정 무렵에 zero o'clock을 듣다가 펑펑 울었다. 가뜩이나 우울했던 일상 속에 한밤 중의 감성이 나를 덮쳤고, 한참을 울고 나니 문득 이 가사와 함께 지금의 상념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러한 센티한 마음은 밤에만 느낄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새벽에 일어나던 그 나날들에는 없었던 마음. 밤에 깨어 있으니 우울한 건지, 아니면 우울하니까 밤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건지는 모르겠다. 언젠가 이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또다시 의지에 불타오르는 그런 봄날이 온다면, 시간을 쪼개가며 살아가는 치열한 일상을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시 달려 나갈 때는 아마 이 노래가 마음에 와 닿지 않겠지. 지금 쓸 수 있는 글은 지금 써두자고 마음먹었다. 미래의 내가 다시 읽으며 대체 무슨 센티함이냐고 투덜거리는 날이 오더라도.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그렇게 또다시 시간의 탑을 쌓다 보면 또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 듯 괜찮아져 있을 것이다. 원래 슬럼프라는 건 나도 모르게 왔다가 나도 모르게 없어지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또 그렇게 한참을 치열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 그 반동으로 축 가라앉는 날은 때마다 올 것이고. 그냥 이유 없이 힘든 때는, 이유가 없으니까 이유 없이 괜찮아질 거라 믿으며...


나는 잠시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우적우적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런 날 있잖아 이유 없이 슬픈 날
몸은 무겁고 나 빼곤 모두 다 바쁘고 치열해 보이는 날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벌써 늦은 것 같은데 말야
온 세상이 얄밉네
(...)
집에 와 침대에 누워 생각해봐 내 잘못이었을까
어지러운 밤 문득 시계를 봐
곧 12시
뭔가 달라질까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래도 이 하루가 끝나잖아
초침과 분침이 겹칠 때 세상은 아주 잠깐 숨을 참아
zero o'clock
(...)
조금씩 박자가 미끄러져
쉬운 표정이 안 지어져
익숙한 가사 자꾸 잊어
내맘 같은 게 뭐 하나 없어
그래 다 지나간 일들이야
혼잣말해도 참 쉽지 않아
(...)
두 손 모아 기도하네
내일은 좀 더 웃기를 for me
좀 낫기를 for me
이 노래가 끝이 나면 새 노래가 시작되리
좀 더 행복하기를
아주 잠깐 숨을 참고 오늘도 나도 토닥여
Turn this all around
모든 게 새로운 zero o'c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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