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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04. 2020

묘지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죽은 자들의 날'

올해 10월에 월간 <샘터>에 글을 하나 기고했었다. 폴란드의 만성절에 대한 글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다. '올해 만성절에는 나도 꽃과 초를 챙겨서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묘를 찾아가 봐야겠다.'라고. 그러나 이 다짐은 지켜지지 못했다. 2020년 만성절에, 폴란드 모든 공동묘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


묘지의 문이 닫히자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에 친지의 묘비 앞에 두었어야 할 꽃과 초를 문 밖에 두었다.


 전통적으로 수백만의 폴란드 사람들은 만성절 기간 가족의 묘를 찾아 여행을 한다. 몇몇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조상의 묘를 찾기 위해 전국을 횡단하기도 한다. 바르샤바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묘지 주변의 버스정류장을 위주로 대중교통 경로를 변경하기도 한다. 17세기에 세워진 오래된 공원묘지가 있는 우리 동네에도 평소보다 더 많은 버스를 찾아볼 수 있었던 날이었다.


 만성절은 가톨릭의 종교적 기일에 기반한 전통이지만, 종교를 탄압했던 공산주의 시절에도 지켜지던 폴란드 고유의 전통이기도 하다. '모든 성인의 날'이라는 명칭을 '죽은 자들의 날'로 변경했을 뿐이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만성절의 전통은 지켜지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폴란드 정부는 코로나 감염 위험에 따라 만성절과 이를 포함한 3일 연휴 기간 동안의 공동묘지 출입을 금지했다. 폴란드의 코로나바이러스 일일 확진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전체 확진자 수는 이 2만 명이라는 숫자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추측에 모두가 동의한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가 확진을 받았고(감염 경로가 확실하고), 고열이나 후각의 상실 같은 너무나 명백한 증상이 있다면 이곳 질병관리청에서는 그냥 10일 동안 집에 있을 것을 권고한다. 검사 장비도, 인력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굳이 안 봐도 뻔한 양성 환자를 시간과 비용을 들여 검사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코로나 양성 환자의 경우 증상이 없어진 이후에도 추가 검사를 통해 음성으로 결과가 나오고 전염력이 없다는 게 확실해져야 격리를 해제하지만, 이곳에서는 양성 판정 이후에도 열흘의 격리가 끝나면 그걸로 끝이다. 타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 양성 환자가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하루 검사 건수는 약 7만 건인데 그중에 2만 건이 양성으로 나온다. 전체 검사수의 30퍼센트가 양성으로 보고되는 무시무시한 확진 비율이다.


 상황이 이런데 좁은 묘지 입구 주변에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룬다면.... 아찔하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순간 이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게다가 성묘를 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생애의 많은 시간을 죽은 자들과 함께 보냈던 노인들이다.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걸 알지만, 가장 '폴란드스러운' 전통마저 금지되었다니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별다른 이변 없이, 정부의 의지대로 올해 명절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공동묘지의 문은 굳게 닫히고, 묘비 앞에 놓여 있어야 할 꽃은 묘지 문 밖에 놓여있었다. 항상 이맘때쯤 공원 앞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전통과자를 파는 노점상인은 보이지 않고 그 대신에 출입을 감시하는 경찰차가 앞에 서 있었다. 쓸쓸한 가을날의 풍경이 더 외로워 보였다. 과연 2020년을 뒤덮은 이 전염병은 얼마나 더 많은 풍경을 바꿔놔야 우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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