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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Feb 09. 2021

너그러움은 탄수화물에서 온다

폴란드에만 있는 당 충전의 날, 뚱뚱한 목요일

 긴긴 겨울이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늘은 발목을 훌쩍 넘어 종아리까지 차오르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오늘의 최저기온은 영하 9도. 내일은 영하 11도. 그다음 날은 영하 16도.... 이런 혹한의 추위는 이달 말까지 계속될 거라고 한다. 2월 말에 영하 10도 아래의 강추위라니. 입춘이 지난 지가 언젠데. 대체 봄은 언제 오는가. 오기는 할까.


 이 엄동설한을 뚫고, 엄마라는 중책을 맡고 있는 나는 먹을 것을 구하러 마트에 간다. 그나마 산으로 채집을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만 주워 담으면 되니까.... 복 받은 현대인의 문명생활에 감복해야 하는데... 아, 다 모르겠고 집을 나서자마자 왕복 6차선 도로마저 제설이 되지 않은 도로 상태에 절망할 뿐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까지 돌아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8시에 집에서 출발해서 집 차고에서 시동을 끈 건 11시. 점심만 먹고 다시 애들을 데리러 출발해야 하나, 마트에 다녀올 시간은 충분할까, 다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얼마나 막히려나... 등등 여러 고민이 머리를 스쳤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차 속에서 낭비하려나 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우, 이번 겨울은 정말 너무 지겹고 지친다.



 그런데 슈퍼마켓에 들어서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마트 주차장과 사뭇 대조되는 풍경이 펼쳐졌다. 바깥의 잿빛 하늘은 남의 이야기라는 듯 마트 입구에서부터 달달한 냄새와 알록달록한 색깔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빵이 주식인 폴란드는 거의 모든 마트마다 꽤 커다란 규모의 제빵 코너를 운영하고 있고, 그곳에서 온갖 종류의 식사용 빵을 판다. 내가 즐겨가는 리들(Lidl) 마트의 경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있는 제빵 코너가 나를 제일 먼저 반기는데, 보통은 통밀이나 호밀을 기본으로 해서 여러 견과를 섞은, chleb이라고 불리는 검은 빵을 주로 판다. 그런데 오늘 그 제빵 코너가 마치 던킨도너츠라도 되는 양, 설탕 대폭주의 현장으로 돌변했다.


이미지 출처: https://culture.pl


 아, 그날이 왔군.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벌써 폴란드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민족 대설탕(?)의 날, 이름하여 Fat Thursday. 폴란드어로는 Tłusty czwartek(트우스틔 츄바르텍)이라 부르는 '뚱뚱한 목요일'이다.




 유럽의 겨울은 혹독하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까지는 버틸만하다. 12월이면 하루에 하나씩 초콜릿을 꺼내먹는 아드번트 캘린더도 있고, 길거리마다 온갖 전구 장식이 넘쳐나고,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그 시기만의 독특한 설렘이 있다. 비록 해는 짧아질망정, 그래도 겨울은 언젠가 가고 봄이 오니까... 하는 마음으로(그리고 사실 본격적인 겨울 날씨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으므로)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1월이 지나고 2월이 왔는데도 날씨가 이 모양 이 꼴이면, 게다가 이번 겨울처럼 월화수목금금금 눈이 오는 지긋지긋한 겨울이 계속되면, 그래서 10살 꼬맹이의 입에서마저 "눈이 너무 지겹다"는 투덜거림이 들릴 때쯤이면 우리는 직감한다.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 때문에 나의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는 것을.


눈이 지겹니 어쩌니 해도 오늘처럼 또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주면.... 또 신나나 보다. 부럽다, 어린이여.


 그래서일까. 매년 2월 둘째 주 목요일을 '도넛 먹는 날'로 정해둔 폴란드의 풍습에, '아 배우신 분'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도넛 먹는 날이 끝나면 밸런타인데이가 오고, 밸런타인데이가 지나가면 아이들이 색색깔의 코스튬을 입고 행진하는 카니발 축제가 온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그러면 이 혹독한 겨울이 끝나 있을 거라고 달래며 우울할 틈 없게 달콤하고 화려한 이벤트들을 2월에 툭툭 던져놓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을 여는 뚱뚱한 목요일이 바로 이번 주 목요일이다.


 눈 앞에 온갖 도넛의 향연이 펼쳐졌으니 차마 외면할 수 없다. 모름지기 타국살이의 매력은, 한국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을 이 나라의 명절을 마치 현지인처럼(혹은 현지인보다 더 열성적으로) 알뜰살뜰 챙겨가며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종이 박스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도넛 8개를 담았다. 아이들은 두 개씩 주고, 나랑 남편은 살찌니까 한 개씩만 먹어야지... 하고 나온 셈법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분명 한두 입 먹어 보고 이건 맛이 맘에 안 들어, 하며 또 엄마에게 넘기는 도넛들이 생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걸로 넘겨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며 도넛을 담았다. 오늘 저녁 이 도넛을 먹은 아이들은 슈가 하이가 되어 나를 괴롭힐 것인가, 아니면 탄수화물의 너그러움으로 아이들끼리 사이좋게 놀 것인가. 부디 후자이길 간절히 바란다.


 혹시라도 구겨질까 봐 도넛 박스를 장바구니에도 담지 안고 소중하게 안고 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박스를 탁자에 내려놓고, 다시 뒤돌아 나가 차에 시동을 건다. 여전히 도로 상태는 엉망이고, 오늘 예상 적설량인 20cm는 이미 옛 저녁에 넘은 것 같다. 고작 8킬로미터 떨어진 아이들 학교까지 얼마나 또 오래 걸리려나. 차 트렁크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을 뚝뚝 뗴어내며, 창문에 그대로 얼어 달라붙은 눈 결정을 쓸어내며 한숨을 쉰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돌아오면 도넛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한 잔 내려서 먹어야지. 도넛 상자를 보고 좋아할 아이들의 얼굴과, 입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릴 도넛의 맛을 상상하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누군지 몰라도 뚱뚱한 목요일을 창시했을 먼 과거의 누군가여. 폴란드에 사는 한국 아줌마는 아마 당신의 상상 범위 밖이었겠지만, 이 정도면 제가 당신의 의도에 제대로 부응한 것 같죠? 고탄수고지방의 은혜를 입어 이 겨울에 디룩디룩 올라온 너그러운 살집은 분명 여름의 나를 괴롭힐 테지만, 일단은 정신 건강이 먼저다. 그러니 올해의 뚱뚱한 목요일도 아낌없이 먹고 즐겨볼 참이다. 목요일이 아니라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부터 도넛파티를 벌이는 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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