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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02. 2020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일까

 지난 7월에, 폴란드의 낙태금지법과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낙태권보다는 성교육에 더 초점을 맞춰 쓴 글이었지만... 4월 반대 시위로 인해 살짝 잠잠해졌던 이슈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폴란드의 헌법 재판소는 지난 10월 22일, "건강을 기준으로 낙태를 결정하는 것은 생명권과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그동안 허용해 왔던 기형의 태아에 대해서도 낙태를 금지했다.(1) 이번 결정에 따라 성폭행과 근친상간에 따른 임신, 그리고 임신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낙태가 허용된다.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게 낙태를 금지해 온 국가 중 하나이고, 2016년의 검은 시위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낙태법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부(법과 정의당 PiS)와 여성단체 간의 끊임없는 반목이 있어왔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그동안 모든 형태의 생명 존중을 강조해온 바티칸의 프란치스코 교황마저 폴란드 법원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히면서 더욱 크게 두드러졌다.(2) 그리고 이를 수용할 수 없는 폴란드 수만의 시민들이 모두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내가 사는 바르샤바는 시위의 집결지가 되었다. 전국에서 이날의 시위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모였고, 오후 4시 이후부터는 어느 거리를 막론하고 시위대의 행렬이 있을지도 모르니 외출을 각별히 삼가라는 지시가 내려졌었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임시체류자의 신분이기 때문의 대규모 시위가 위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상황도 함께 고려해야 했으니까. 시위가 있었던 이날 오전 보고된 코로나 바이러스 일일 확진자 숫자는 21,897명. 역대 최고치였다.




 이날 오전, 아이가 다니는 학교 교장이 이메일을 보내왔다. 방학중이었고, 따로 이메일이 올 만한 학내 이슈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수신인을 보고 의아했으나 곧 이메일을 열어 보고 이해가 되었다. 오늘 오후 예정된 낙태법 반대 시위에 '제발 가지 말아 달라'는 이메일이었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에게도.

 시위에 참가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고, 또한 이와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시위의 참가 여부에 일개 사립학교 교장이 관여할 수는 없다. 교장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장의 이메일엔 'Please'와 'I'm Sorry'라는 완곡한 표현이 함께 적혀 있었다. 현재 폴란드의 방역 현실은 암담하다. 일일 확진자 2만 명이 넘는 상황에서 계속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교장은 이런 이메일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송신을 누르기 전에 자신이 이런 이메일을 보내도 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 같다. 이메일엔 그런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러나 끊임없이 교내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혹여라도 시위에 참가한 학생 한 명, 학부모 한 명이 불러올 전염병의 파장을.... 그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날 밤, 시위 현장의 보도사진을 보는 내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폴란드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반대하며, 이 시위를 지지한다. 나는 평생을 가톨릭교도로 살아왔지만... 법원의 결정이 과연 종교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심스럽다. 그래서 필요한 시위라고 생각한다. 뱃속에 아이 한 번 품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내린 결정에 이대로 많은 여성들의 삶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사는 한 사람의 엄마로서, 또한 이 시위를 보는 마음은 너무나 염려스러웠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사진만 봐도 흠칫 놀라게 되는 팬데믹의 시대. 시위 현장의 사진을 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우리도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나가야 할 때 코로나바이러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바이러스 때문에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폴란드에서도 많은 것이 온라인으로 대체되었고, 심지어 4월에도 온라인에서 낙태법 반대 시위가 있었지만 법원은 눈 앞에 보이지 않는 시민들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하고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확진자가 열 배 스무 배로 치솟는 10월. 낙태법 위헌 결정이 내려진 다음날 총리는 폴란드 전 지역을 적색경보 지역(레드존)으로 발표한다.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너무나 아름다웠던 이 도시의 야경을 보면서... 그 와중에 참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생각들이 얽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피하고 싶은 현실과 피해서는 안 되는 진실이 함께 뒤섞여 있다. 세계는, 이 나라는, 이 도시는 촘촘히 나와 연결되어 함께 움직이는데... 생명, 신념, 자유, 안전 그리고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일까.


나는 그 질문에 차마 답하기 어렵다.




(1) 연합뉴스. 폴란드 헌재 기형태아의 낙태 허용에 '위헌' 결정. https://www.yna.co.kr/view/AKR20201023001000082?input=1195m

(2) 연합뉴스. 교황, '낙태 허용 축소' 폴란드 헌재 결정 지지 https://www.yna.co.kr/view/AKR20201029187400109?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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