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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28. 2020

육아서 탐독의 역사

그리고 주체 없이 흩날리는 팔랑귀의 역사



 '엄마'라고 처음 불린 건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첫째를 임신 중이던 스물넷(!? 아니 라고요...)의 나는 산후조리원과 연계된 만삭 사진 스튜디오에 예약전화를 걸다가 '푸름이 어머님'이라는 생경하고 당황스러운 호칭을 처음 접했다. 결혼 준비하면서 들었던 신부님, 산부인과에서 들었던 산모님이라는 호칭도 처음 들었을 때 참 당혹스러웠는데 그것은 '어머님'이라는 호칭에 비하면 댈 게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깔깔 웃었다. 그리고 같이 연구실에 있던 동료들에게 "나보고... 나보고 어머님이래!!!!" 하면서 오만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내가 곧 엄마가 된다는, 그래서 이 호칭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선명한 첫 자각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대학원에 다니는 석사과정생이었는데, 그때쯤부터 대학도서관의 아동, 가족 세션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원래 전공도 심리학이었던지라 인문, 사회과학, 생활과학 분과를 넘나들며 책을 찾아다녔지만 아예 육아서를 읽겠다는 '엄마의 마음'으로 책을 구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아서, 즉 아이는 이렇게 저렇게 키워야 한다는 약간의 잔소리 + 경험 + 전문적인 지식이 융합된 책을 그때쯤 처음 읽었다. 나의 첫 육아서는 푸름이 아빠로 유명한 최희수 씨의 <푸름이 이렇게 영재로 키웠다>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첫째의 태명이 푸름이였기 때문에 그 빼곡한 대학도서관의 서가에서 칵테일 효과로 이 책이 가장 먼저 눈에 똭 들어왔다. 논문과 전공서적으로 가득한 내 책상에서,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너무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지나가던 언니들이 보고 한 마디씩 던졌다. 푸름이를 영재로 키우려는 야망이 가득한 엄마라고.


 야망 따위는 없었지만 남들이 아이를 키우는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이야기를 처음 접해봐서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 뒤로 10년 간, 그때보다는 조금 더 무겁고 진지한 마음으로 수많은 육아서를 읽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지라 주변에 육아 조언을 구할 만한 선배 엄마가 없었고, 게다가 내 전공이 아동심리인데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겠냐는 약간의 자만심도 있었으며, 그래서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사람 대신 책을 펼쳤다. 지금까지 읽어본 육아서를 대충 세어보니 못해도 100권은 넘는 것 같다.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에 보면 무슨 분야든지 100권의 책을 정독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1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는데도 육아의 전문가가 되지 못했다. 책만 많이 읽어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 쉽고 가벼운 해결책이 없을 텐데, 애초에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본다.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책에 많이 휘둘렸다. 책 육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을 읽으면 미친 듯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날랐고, 엄마표 영어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 영어 원서를 사들이고 한동안 집안의 모든 배경음을 영어동요로 바꿨다. 어떤 때는 다정다감하고 아이의 속마음을 읽어주는, 장황하고 말 많은 엄마로 살다가 또 어떤 때는 단호하게 집안의 규칙을 정하고 원칙을 강조하는 엄마로 살았다. (참 줏대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여러분 이게 제일 나쁜 거예요...) 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덜 먹일 걸, 키워놓고 보니 그게 후회된다는 박혜란 선생님의 말씀에 한동안 열성적으로 유기농 엄마표 집밥을 고집하다가, 엄마도 사람인데 가끔은 쫌 쉬엄쉬엄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글을 읽으면 그날 주방에서는 보글보글 라면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이 갈대같이 흔들리는 팔랑귀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최근에 읽은 육아서는 오소희 작가의 <엄마의 20년>, 박혜란 교수의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그리고 옆 나라 독일에 살고 계시는(더불어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카톡 친구로 지내고 있는) 이진민 작가님의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이다. 브런치 매거진을 함께 발행하는 작가님들과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으로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데, 앞선 두 권이 11월 모임에서 다룬 책이라 모임을 앞두고 최근에 다시 읽어보았다. 진민 작가님의 책은 나오자마자 출간일에 주문해서 당일배송으로 받아보긴 했는데, 한국에서 폴란드까지 오는 선편 택배가 무려 넉 달이나 걸리는 바람에 이제야 내 손에 들어와서 아껴가며 읽는 중이다. 그리고 이 세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면서 또다시 나의 이 깃털처럼 가벼운 '엄마의 마음'은 온 사방천지로 날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무려 '시간여행'을 했다.

 


 가수 이적의 엄마로도 잘 알려진 박혜란 선생님의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은 저자가 세 아들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을 지나 여섯 아이들의 할머니가 되었을 때 쓴 책이다. 첫째가 두 돌이 되었던 2013년 5월에 출간된 책으로 이 책 역시 출간되자마자 덥석 구매해서 지금까지 네 번쯤 반복해서 읽었다. 이전의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이 책 역시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발제하는 작가님은 '나의 인생 책'이라며 소개해주셨다. 나 역시 첫째가 두 돌 때쯤 되었던 초보 엄마 시절(그때에 비하면 그래도 지금은 초보 엄마는 아닌 것 같다. 중수 엄마쯤?), 처음 읽고 엄청나게 감화되었던 책으로 한 때는 이분을 육아의 롤모델로 삼으며 수많은 밑줄이 남았다. 나도 아이 셋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대학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셋째가 학교 입학할 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는 박혜란 교수님처럼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그런 미래를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마음에 담았다.


 오소희 작가의 <엄마의 20년>은 작년 12월에 한국 방문 중에 구입했던 책이다. 그러고 보니 세 권 다 출간되자마자 바로 구매했다는 공통점이 있겠다. 이 책은 내가 구입한 오소희 작가님의 일곱 번째 책이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님이고 그간 여섯 권의 책을 읽으며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은 이미 천장까지 뚫을 기세였기에 고민도 하지 않고 덥석 집어 들어 꿈꾸듯이 읽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셋째가 세 돌이 되었고, 아이들 셋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며 조금은 육아 부담에서 벗어나 나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싹트기 시작했다. 더불어 그때쯤 한글학교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모 출판사에서 육아서를 내보자는 출간 제의가 왔었다. 온전히 엄마로만 살아왔던 시간 속에서도 그간 틈틈이 버둥대며 나만의 '더 가치'를 가꿔보고자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이 스쳐갔다. 나보고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 힘내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만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엄마의 20년>에 보면 '눈썹부터 그리자'라는 챕터가 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방문을 딱 닫고 엄마는 나를 위한 시간을 시작해야 한다. 눈썹을 그리고 밖으로 나가 동선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는 집에 남고 세상은 멈췄으며 외출은 금지되었다. 그동안은 '아이가 조금 크면, 조금만 더 크면...'을 마법의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풀타임 육아의 시간들을 버텼는데, 이번에는 그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았다. 막막하기만 했다. 세상 물정을 하나둘씩 알아가는 아이들은 오히려 더 섬세한 관심과 교육을 필요로 하는데, 그 부담과 책임은 나눌 사람 없이 오롯이 엄마에게만 주어졌다. 그 속에서 허덕이며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보냈다.


 세 번의 계절을 보내는 동안, 나는 더 이상 모든 일을 '아이가 크고 난 후'로 미루지 않고 그냥 지금 시작해보자고 결심하고 여러 가지 일을 벌였다. 한없이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다가는, 그 나중이 대체 언제쯤 오는지도 모르겠고, 내 세계를 구축하기는커녕 그냥 애만 키우다가 늙어갈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이미 10년의 시간 동안 엄마로, 그것도 강도 높은 세 아이 엄마로 살았다. 아이가 하나인 오소희 작가는 20년이면 '엄마 졸업'을 한다지만, 나는 27년을 보내야 한다. 대체 그게 언제 온담.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오롯이 엄마로 살았으면 됐어. 나도 이제 제발 내 인생 좀 찾아보고 싶었다.  

 하루 한 편씩 글을 쓰고, 새벽에 일어나 외국어를 공부하고, 매일 틈틈이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매일 부지런히 책을 읽고 온라인으로 맡은 글쓰기 수업의 수업자료도 틈틈이 만들면서 그렇게 살았다. 나는 그 모든 행위를 전업주부의 사치스러운 취미생활로 폄하받고 싶지 않아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라고 불렀으며, 아이들이 놀아달라고, 나 좀 봐달라고 보챌 때마다 "엄마 지금 일 좀 해야 해."라고 대답했다. 일상의 여러 장애물을 애써 무시하며 열심히 '나'로 살고자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일'도 중독될 수 있다. 워커홀릭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미래의 엄마가 이야기하는 엄마의 미래를 읽으며, 미래의 나를 예비하는 이 일련의 일들에 나는 심하게 불타올랐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아이들이 내 인생을 방해하는 방해꾼으로 보였다.


 만 세 살, 다섯 살 아이들, 그리고 다 큰 것 같지만 사실은 섬세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 10대 딸과 한 공간에 있으면서, 마치 30대 싱글여성이 사는 것처럼 살려고 했다. 그런 삶을 질투했고, 그들을 부러워했다. 혹은 박혜란 작가나 오소희 작가처럼, 성년이 된 아이를 둔 '엄마 졸업생'처럼 살려고 했다. 몸은 현재에 있는데 마음은 미래에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먼 미래로 날아가 버린 내 정신을 휙 붙잡아 현실 세계로 데려와 준 책이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였다.

 



 이 책에는 우리 아이들보다 어린 나이의, 작고 사랑스럽고 꼬물거리는 생명체들이 나온다. 뭣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덥석 엄마가 되어버린 나와는 달리 세상 물정 다 아는 나이(?)에 엄마가 된, 게다가 철학마저 공부한 작가님이 임신, 출산, 그리고 격동의 수유기를 거쳐 이족보행 꼬마 난쟁이들을 키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내심 전공도 심리학이겠다, 애도 셋이나 키워봤겠다, 딸도 아들도 다 골고루 키워봤겠다... 애들이 다 자라고 나의 육아 성적표가 꽤 성공적으로 나오면 언젠간 나도 육아서를 써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렇지만 한창 애들이 자랄 나이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라 생각했었다. 실제로 재작년인가 세 살짜리 외동아들을 키우는 어느 엄마가 쓴 육아서를 읽다가 고작 그 몇 년의 육아로 전문가가 된 것처럼 구는 태도에 질려 휙 던져버린 적이 있었다. 지금 내가 책을 쓰면 딱 그 꼴 날 것 같았다. 근데 똑같이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작가님의 이 책에는 오히려 그래서 더 특별한 것이 있었다. 하나는 옛날 옛적부터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 철학하는 할아버지들을 육아의 파트너로 모셔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지금 동시대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막 잡아낸 생선처럼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이야기가 실려있다는 점이다. 엄마로 살아보는 경험이 처음이라서, 너무 낯설어서 건져 올려낸 이 이야기들은, 사실 10년이나 엄마로 살아보니 너무 지겨워서 이제는 제발 좀 나로 살아보고 싶다고 절규하는 나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 책에는 '아이들의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 이 작고 어린 생명체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아이들의 속도에 맞춰 세상을 느껴본다. 철학자들의 사유에 기대어 지금의 내 아이를 깊이 이해해보려는 엄마,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로 생각을 확장시켜나가는 엄마가 있었다.


 세상 만물을 조금씩 낯설게 보는 일은, 조금 당황스럽긴 해도 꽤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이다. 아이가 크는 그 시간의 길을 따라 또 얼마나 다양한 세상의 물건들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인지, 나는 사실 조금 기대하고 있다. 그렇게 조금씩 넓어지는 시선,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해주는 아이들이 있어 내 삶도 알록달록 해지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이지민 저, <나는 철학하는 엄마입니다> 133쪽.

 사실, 얼마나 예쁜가. 아이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눈길과 손길로 나를 바라보고 어루만지는가. 내가 아이를 안고, 아이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는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배시시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얼굴, 사랑이 담긴 그 작고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아이들은 자라나서 곧 문을 걸어 잠글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도 못 뜬 찐빵 같은 얼굴로 엄마를 찾느라 온 집 안을 헤매고 다니는 일도 곧 없어질 것이고, 내가 샤워하는 욕실 앞에서 두 녀석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일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같은 책, 153쪽


 '나도 분명 저런 눈빛을 하고 콩닥거리며 엄마를 보던 때가 있었는데, (161쪽)'라는 대목을 읽는 중에 마침 우연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아이의 눈빛이 너무 낯설었다. 아니, 아이의 눈빛을 바라보는 경험이 너무 낯설었다. 최근에 내가 이렇게 아이의 눈을 깊이 마주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늘 건성으로 대답했다. 처음으로 엄마란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오두방정을 떨지는 못할지라도, 아이가 나를 부르는 음성에 최소한의 진심을 담아 대답해야 했다. 나를 방해하고, 귀찮게 하고, 그리고 도망가고 싶게 하는 존재가 아이는 아니었다. 아이여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지긋지긋한 엄마 소리 좀 그만 듣고 싶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엄마 대신에 아빠를 부르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사실 아빠도 엄청 많이 부른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글을 쓰던 노트북을 닫고,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서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그리고 그 눈빛 뒤에 숨은 아이의 영혼을 바라보는 경험. 마지막으로 그걸 경험했던 게 언제였을까?


 휴대폰 스크린 안의 세계가 자꾸 나를 잡아끌기는 하지만, 제대로 폰을 놓고 눈을 들어 내 삶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내 삶을 허비하게 된다. 그들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며, 내가 내 삶을 충만히 살고 하루하루 좋은 것들을 쌓아 다시 만나야 그 만남이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책, 146쪽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런 책이었다. 미래의 자유로운 나를 꿈꾸며, 그 순간의 나를 준비하며 미래 세계로 붕 떠나버린 내 정신을, 자꾸 미래로 떠나버리려는 나의 영혼을 억지로, 멱살이라도 콱 잡아서, 여기. 지금. 바로. 현재로 끌고 오는 책이었다. 모니터에서 눈 떼라고. 육아서에서 눈 떼라고. 그리고 저 아이의 눈을 바라보라고. 작가님한테 멱살을 잡힌 채 현재로 질질 끌려왔다.


 그 멱살잡이의 기분은 어땠냐면... 아팠다. 멱살은 잡히니까... 정말 아팠다. 참 많이 아팠다. 그래서 엉엉 울었다. 사실은 그렇게 며칠간 성심성의껏(?) 우느라 이 글이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내가 쓴 글이 내 머릿속 어딘가를 툭 건드린 건지, 이 책이 건드린 건지, 아니면 뭐가 됐든 아무라도 날 건드리면 툭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던지... 며칠간 아무 생각 없이, 나라 잃은 사람처럼 엉엉 울고 또 울었다. 그 울음이 마치 폭풍우처럼 마음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서, 머릿속이 아주 그냥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이후의 바닷가 마을 같았다. 멍하니 가만히만 있어도 수도꼭지에서 물을 튼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는 시기가 있었다. 그렇게 물 빠짐(?)을 며칠 겪고 나니... 이제는 수재민 지원군이 다시 마음속으로 들어와 쓰레받기로 물도 퍼다 주고, 부서진 집도 고쳐주고, 똑딱똑딱 보수작업을 하나씩 해 주며, 글도 다시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나왔다. 지원군은 과거의 나, 현재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였다.


 미래의 내가 와서 말했다. 다 좋다고. 참 잘하고 있다고. 애 많이 쓰고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초조하게 앞만 보려 하지 말고 잠깐 멈춰서 아이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말한다. '엄마의 20년' 후에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하고 회상할 게 아니라 지금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보라고. 그렇지 않으면 미래의 나는 이 지나간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아쉬워서,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리워서 많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서진 집에 못을 박는 거처럼 아픈 이야기였지만 맞는 이야기였다. 오소희 작가의 <엄마 내공>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다시 떠올랐다. "뜨거운 연애를 하는 사람은 연애소설을 읽지 않는 법입니다. 육아서 읽을 시간에 그냥 육아를 하세요." 그녀의 '엄마의 20년'이란 제목도 다르게 읽혔다. 그래도 일단 '20년' 동안은 엄마로 살아야 해.




 그래서 요즘은 어떻게 살고 있냐면, 여전히 똑같다.

 여전히 육아서를 읽고, 조금 휘둘리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엄마의 본분으로 돌아오다가... 조금 여유가 있으면 이렇게 글도 쓰고 그러다 아이들이 부르면 성급히 노트북을 닫고, 그렇게 살고 있다. 가끔은 울고, 가끔은 짜증내고, 가끔은 답답해하다가.... 그래도 아이들이랑 더 많이 웃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함께 달리고, 숨바꼭질을 하고, 그리고 좀 더 아이 볼에 내 볼을 더 많이 부벼보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정지우 작가님의 <행복이 거기 있다, 한점 의심도 없이>에서 또 한 문장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중세 시대 수도사들에게 찾아오는 '아케디아 Akedia'라는 악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 글은, 수도사를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끄집어내어 '저 먼 곳'으로 달려가게 하는 악마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에 마상에. 저 악마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한테 왔었구먼... 하며 탄복하며 읽었다.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지금 여기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은 제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여기에 깨어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다른 곳에 있고 그곳에서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에 깨어 있길 원하지만, 그래서 어느 먼 곳으로 떠나려 하지만, 그 먼 곳에서도 그가 여전히 만나야 하는 것은 지금 여기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악마의 포로가 되어 끊임없이, 가장 빠른 속도로, 계속하여, '이곳'을 탈출하고자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잊으며, 지금 여기를 잊으며, 계속해서 도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정지우 저,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 : 쓰는 사람 정지우가 가득 채운 나날들>


 한창 육아서 이야기하다가 육아서 아닌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는 이 맥락 없음을 이해해주시길.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쓰신 정지우 작가님도 어린 아들을 키우는 아빠이기도 하고, 이상하게 엄마가 되고 나서 책을 읽으니 육아서 아닌 책들도 모두 육아서로 읽힌다. 그렇게 생각하니 엄마가 되고 나서 읽은 700여 권의 책 모두 육아서였다. 세상에 엄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고, 모두 조금씩 엄마의 양분을 먹고 자란 경험이 있으며, 그 모든 책에서 나눠주는 경험과 지혜가 모여 나라는 사람의 '엄마 다움'을 만들어냈다.  


 내 마음을 시끄럽게 하는 걱정거리들, 분노와 답답함, 스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똘똘 뭉쳐버린 앙금들.

 엄마 역할, 아내 역할, 자식 역할, 내 본분에 맞는 역할. 그리고 그 역할들에 치여서 내가 '나'로 살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서글픔. 여러 관점에서 날 짓누르는 미래에 대한 걱정들, 비정상적인 사회의 모습들. 나를 잠식해 가는 이런 수많은 시커먼 생각들을 가득 안은 채, 알록달록 예쁜 표지의 따뜻하고 정감 어린 육아서들을 읽는다. 그리고 또 휘둘리다가, 훌훌 털다가, 이렇게 글로도 감정을 토해내다가 그렇게 산다. 이 모든 일들을 오백 번쯤 반복하고 나면, 아이들을 훌쩍 커 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들의 키를 쟀다. 여름에는 한 달에 1센티씩은 컸는데, 11월의 성장량은 고작해야 0.3밀리미터밖에 안 된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키가 더디게 컸냐며 투덜댄다. 그렇지만 그 투덜대는 모양과는 다르게, 벽지에 선명하게 자로 그어진 지난 2년 간의 성장 기록을 보면 한 뼘도 넘게 쑥 자라 있는 게 아이들이다. 아주 더디지만 매달 눈금은 점점 위로, 위로 올라간다. 그 눈금이 올라가는 속도만큼, 나도 엄마로 자라고 있을 것이고, 엄마가 아닌 나도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만의 속도로, 내 식으로.


 '나의' 엄마의 27년. 그리고 그중에 반짝반짝 빛날 17년이 아직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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