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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an 23. 2021

부지런히 사랑하고 있습니다

 PPT 파일을 만들며 '16차시 수업'이라고 제목을 적는다. 날짜를 적고,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16차시'라는 제목을 지우고 '마지막'이라는 단어로 바꾼다. 마지막 수업. 알퐁소 도데의 소설이 생각나는 제목이다. 다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지웠다. 왠지 너무 감상적인 것 같아서.




 작년 이맘때부터 이곳 한글학교 교사로 일했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부터 '한글학교 교사로 일해보면 어떻겠냐'라고 권유를 많이 받았다. 예전에 짧게나마 가르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다고 답하면 다들 '역시,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라고 답했다. '역시' 라니. 내 얼굴에 선생님이라고 쓰여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내게는 선생님스러운 분위기가 있다.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며 교실에 잠시 머무를 때면 다들 나를 새로 온 선생님인 줄 알고 아이들이며 학부모며 할 것 없이 나더러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처음엔 당혹스러웠다가, 이런 일이 거의 매주 반복되다시피 해서 나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냥 내 팔자가 그런가 보다 하고.


 실제로 사주팔자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한다. 10대 어느 때인가, 아버지 친구분이 명리학 공부를 시작했다며 우리 가족 생년월일을 받아다가 사주풀이를 해준 적이 있었다. 네 식구의 사주를 봐주고 그걸 A4 두 장에 정리해서 팩스로 보내줬는데, 어린 마음에 그곳에 적혀있는 글이 너무 신기해서 틈날 때마다 반복해서 읽곤 했었다. 나는 커서 무엇으로 벌어먹고 살 것인가, 하는 장래 직업이 제일 궁금했었는데 두루뭉술하게도 아니고 너무 명확하게 '교사 또는 교수가 된다.'라는 문장이 쓰여있었다. 선생님이 된다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을 것 같은 직업인걸. 나는 그보다는 뭔가 더 창조력이 요구되고 자유로운 직업을 원했다. 예를 들자면 디자이너나 소설가 같은. 그맘때 한창 인기 있던 드라마가 김희선이 주연했던 '토마토'였다.


 '교사'가 된다는 걸 진지하게 고민했던 건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가'군에 예전부터 희망하는 대학을 썼는데, '나'군에 쓸 대학이 없었다. 서울대는 아무래도 내신이 바닥이어서 어림도 없을 것 같고, 그래도 기껏 받아놓은 수능점수와 원서 기회가 아까우니 적당한 대학에 지원서를 내보자 싶었다. 그렇게 해서 '서울교대'에 원서를 냈다. 논술을 보고, 면접을 봤고, 합격을 했다. 물론 원래 희망했던 '가'군의 대학에도 합격했기 때문에 전혀 교육대학교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난리가 났다. 너 초등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꿈의 직장인지 알아? 여자들한테 그만한 전문직이 없어. 지금은 신촌 대학가에 있는 학교가 재미있고 좋아 보이지? 너 나중에 대학교 4학년 때 분명 후회할 거다.


 후회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후회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아니고, 나중에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 세 아이를 키우니 육아휴직 2년씩 세 번에, 남편이 7년 동안 해외근무를 하니 그 기간 동안 휴직을 한다고 생각하면 무려 휴직기간만 13년이다. 애들 학교 갈 나이까지 여유롭게 다 키워놓고 복직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이 방학이면 엄마도 방학. 아이를 키우면서 커리어를 유지하기에 진짜 이만한 직장이 없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스스로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앞서 얘기했듯이 나는 외면에서 '선생님스러움'이 뿜뿜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저 주변에서 많이 안타까워했을 뿐이다. '너만큼 딱(!) 어울리는 애가 없는데' 하고 말하며.




 그런 내가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작년 이맘때 첫 수업을 했다. 처음에는 내가 정말 가르칠 능력이 되는가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반년 가까이 계속 거절만 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개인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처음에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막내는 겨우 23개월이었다. 그러다가 수학이니 사회니 다른 과목 말고, 국어만, 글쓰기만 가르쳐주세요. 이런 수업마저도 없으면 이곳에 사는 한국 아이들에게는 모국어로 된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습니다. 학부모 회의에서 한 어머니가 나를 보며 강력히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글쓰기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일이니, 그것을 아이들과 나눈다면 어떨까? 살짝 마음이 두근거렸고,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놈의 재미. 그게 제일 중요했는데, 그게 있을 것 같았다.


글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글을 쓰는 것만큼이나 재밌고도 난감한 일이다. 모두가 그 설명을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 교사라면 잘해야만 한다. 교사의 말은 학생들이 다음 주에 써올 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은 채로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전공했다면 더 좋았을 부분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살아보지 않은 인생이라 알 수가 없다. 이번 생에서는 부지런한 독서와 정기적인 글쓰기 모임으로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글을 어떻게 읽고 쓸지 훈련하는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도 계속 즐거운 훈련이다. 죽었거나 살아 있는 작가들이 책으로 말하는 목소리를 듣는 것. 친밀하지만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친구들과 합평을 하는 것.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을 읽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10대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이 문장은 어느새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 되기도 했다. 그녀와 나의 공통점은 여러 가지가 더 있다. 우리는 문예창작을 전공하지 않고 대신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나는 신문방송학과에서 글쓰기에 대해 배운 적은 없다. 그녀는 배웠으려나.) 그녀는 잡지사에서 일했고, 나는 학술지를 만드는 일을 했다. 어쨌거나 계간 어쩌고를 일 년에 4번씩 발행했으니, 비슷한 일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그녀와 나의 다른 점도 많다. 그녀는 스스로 수업을 창출했고, 나는 주변 권유에 떠밀려서 그 자리를 맡았다. 별로 선생님 같아 보이지 않는 야한 분위기의 20대 젊은 그녀와 달리, 나는 왠지 학교에서 교편 좀 잡아봤을 분위기를 가진 30대 후반의 학부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똑같이, 부지런히 사랑하는 중이다.


 코로나 때문에 중간에 오랫동안 수업을 쉬어서, 작년 한 해동안 아이들이랑 실제로 수업을 한 건 20주가 채 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업 내내 책과 글에 대한 열정은 나만 넘쳤던 것 같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책에 대한 덕질'을 다소 심드렁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지난 일주일간의 독서 노트를 공유하는 시간이면, 아이들의 노트는 텅 비어있는데 나만 신나서 이 책 저 책 그 책 다 끌어모아 잔뜩 필사를 해 왔다.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그러나 나도 아이들 덕분에 변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면서 제일 많이 배운다. 글쓰기 교사가 된 이후로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글을 읽었던가 싶었을 정도로 가르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읽었다. 신문기사를 읽다가도 '이 얘기 학생들이랑 나누면 좋겠다' 싶어서 스크랩하고,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서 필사를 하게 되면, 아이들에게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전후 맥락이 이해될 수 있게 앞뒤로 더 많은 문장을(사실 거의 전문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 읽을 책을 고를 때도 내 흥미 위주로 고르기보다는 10대 아이들이 읽으면 좋을 주제에서 고르기도 하고, 글쓰기에는 재능보다는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일단 나부터가 자꾸 무언가를 꾸준히 써보려고 노력했다. 그야말로, 부지런히 사랑했다.


 중학교 3학년인 아이들은 이제 졸업을 한다. 고등부가 없는 한글학교 학생들에겐 내일이 마지막 수업이다. 내일이 마지막 수업인데....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PPT 파일을 만들면서 하얀 슬라이드를 먹먹하게 바라본다. 나는 10대 아이들에게, 이 시절의 기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수업을 온라인으로 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글은 원고지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내 구글 드라이브에 있다. 접속 권한을 아이들의 구글 계정에도 부여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원하는 때에 언제고 다시 내 문서에 접근해서 자신이 썼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중학생 때 썼던 글들 중 hwp 한글문서로 저장했던 것들은 친정집 컴퓨터가 여러 번 바뀌면서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카페 글쓰기 동호회에 남겨놨던 글들은 아직도 검색 몇 번이면 금세 찾아볼 수 있다. 아주 가끔, 그 오글거리는 글을 일부러 찾아보곤 한다. 나의 한 시절이 거기에 담겨있다.


아이들에게 그런 글을 선물하고 싶었다. 10대의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글. 우리는 지난 반년 동안 여러 가지 글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나'에 대한 글을 제일 많이 썼다. 조금은 학구적인 글, 이를테면 논설문이나 설명문도 많이 썼지만, 그보다는 나에 대한 에세이를 쓸 때 쓰는 학생들도 독자인 나도 제일 재미있었다. 코로나 이후의 변화한 일상,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 과거의 나에게 쓰는 편지, 나의 꿈을 동사로 적어본다면, 시간의 의미... 지난 주에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덕질'에 대해서 글을 썼다. 신나는 글감이었다. 2019년의 나도 아니고, 2021년의 나도 아니고, 2020년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지금, 여기, 내가 쓰는 글.


 내가 바라는 게 한 가지 있다면? 구글이 적어도 반백년 동안은 망하지 않아서 그 서버를 고스란히 간직해줬으면 좋겠고(프리챌과 싸이월드는 망해서 내 글의 절반 이상은 뭉텅 날아가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그 서버에 다시 접속했으면 좋겠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좋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도 좋으니... 언젠가 나 말고 다른 방문자가 그 문서 페이지에 접속했던 흔적이 하나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2035년 1월, 선생님, 저 슬쩍 왔다가요." 이런 문장이 어느 날 더해지면 좋겠다.


 그럼 그때야말로 정말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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