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현 Nov 10. 2021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여전히 폴란드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진도는 느리고 실력은 지지부진하게 늘고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고 계속하고 있다.


 <반지의 제왕>의 작가이자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편찬자이기도 한 언어학자 J.R.R. 톨킨은 평생 60여 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폴리그롯(polyglot: 다국어 구사자)이었다고 한다. 그는 작품 내에서 인공적인 언어를 창시할 정도로 외국어 습득 능력과 언어감각이 뛰어났고, 고대 히브리어를 배워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도전했으나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유럽어가 폴란드어라는 설이 있다. 이 이야기는 폴란드 사람들에게는 큰 자부심의 근원(우리나라 말이 세상에서 제일 캡숑 어려운 말이야. 근데 우리는 그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들이지 흠흠.)이기도 하고, 폴란드어를 공부하는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너무나 이해되면서도(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언어가 다 있지...?) 결국 정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어쩌자고 폴란드에 와서 폴란드어를 배워보겠다고 끙끙대는 것인가.

 왜 하필 폴란드어인가


폴란드어의 변태적인 문법 변화
폴란드어 학습자들에겐 나름 유명한 짤


 그러나 어쨌거나 계속하고 있다. 느리지만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어떤 날은 5분만 들여다보고 책을 덮을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필 받아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공부를 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날은 그 필이 과하게 와서 유료 학습 사이트의 연간학습권을 결제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포기하지는 않고 계속하고 있다. 실력은 지지부진하게 는다. 외국어 능력이란 원래 눈에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늘지 않는 그런 속성의 공부이기도 하지만, 내가 급속도로 실력이 늘 만큼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학습 정체기는 수시로 온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쓰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 학생들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네. 와.. 저들은 폴란드어 공부를 하면 학점이 나오네. 하다 보면 학위도 나오겠지. 나중에 폴란드어 통역사로 일하거나 관련 기업에서 일할 수도 있을 거야. 근데 과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정체기가 올 때마다 '나는 왜 폴란드어 공부를 하는 걸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 나라에 온 한국 주재원 와이프들은 무수히 많지만 막상 폴란드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영어만큼 여러 국가에서 쓰이거나 활용도가 높은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본국으로 돌아가면 만고 쓸 데가 없고, 아이들은 대부분 학비 지원을 받아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일상생활에서 폴란드어를 못 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데다가, 그에 반해 들이는 노력과 수고는 어마어마하게 커야 제대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나라에서 공부를 할 것도 아니고, 일을 할 것도 아니고, 폴란드어 실력을 키워서 기껏해야 쓸 수 있는 공간이 슈퍼마켓이나 동네 식당에 불과하다면 딱히 공부를 할 이유가 없다. 동기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나도 그렇다. 폴란드어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한들, 몇 년 뒤 한국에 돌아가면 과연 이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의아하기만 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노력과 수고를, 매일 일정 시간을 들여 공들여한다는 것. 뚜렷한 목표도 동기도 없이 매일 그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늘 갈팡질팡한다. 일이 몰아치고 바쁜 날이 계속되면 폴란드어 공부는 저만치 우선순위에서 밀려버린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다가 다시 퇴화된 폴란드어 실력을 마주할 때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실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닐 수 없다. 인내는 쓴데, 열매가 없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대게 성격에 모가 났거나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반 고흐처럼 단 한 장도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린다거나, 도스토옙스키처럼 우울증과 발작에 시달리면서 글을 쓰는 일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정도의 수준이다. 사실은 침대에 누워서 리모컨을 드는 게 훨씬 쉽고 훨씬 기분 좋으며 건강에 보탬이 되는 일일 것이다.

한수희 저,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


 한수희 작가의 책, <우리는 나선으로 걷는다>를 읽다가 이 구절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조차도 과연 이 일의 효용을 모르겠는 일. 그 일을 그저 매일, 조용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뚜벅뚜벅 계속하는 일. 그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구절을 읽고 그때서야 내가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제정신으로 살아야 할, 굉장히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내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드니 이렇게 좀이 쑤시는 것이었다. 고흐도 아니고 도스토옙스키도 아닌 그저 평범한 내가 그 힘든 일을 하려고 하다 보니 자꾸 '현타'가 오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비단 외국어 공부만 그럴까. 내가 일상을 채우는 거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 새벽에 일어나 매일 일기장에 빼곡하게 글을 쓰고, 쓰임도 효용도 없이 수백 권의 책을 읽고, 팔 것도 아니고 팔 수도 없는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티도 나지 않는 집안 살림을 매일 계속한다. 매일 끼니를 고민하며 삼시세끼 밥상을 차려내지만 아이들은 계란 프라이에 간장만 곁들여 밥을 슥슥 비벼주던, 전날부터 핏물을 뺀 고기를 열 시간 넘게 푹푹 끓여 기름을 일일이 손으로 걷어가며 갈비탕을 끓여주던 다 똑같이 좋아하고 잘 먹는데 나는 굳이 후자를 선택해서 자학적인 요리를 내놓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차린 밥상이 한 끼 식사로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보면 이대로 그 수고가 묻히는 게 아쉬워 사진이라도 한 장 남겨 인스타그램에 올릴 때가 있는데, 스물네 시간 후에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 그 사진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조회수를 확인한다는 건, 어쩌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뭔가를 대단히 열심히 하는,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그 일을 하면서 제정신으로 살기 위한 마지막 발악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세상에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이 세상을 꿋꿋하고 씩씩하게 살아내는 이 시대의 고흐와 도스토옙스키가 있고, 그들은 책을 쓰고 작품을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다. 이 이상하고 동기도 없고 무용한 듯 보이는 외국어 공부에 지쳐갈 무렵, 가장 큰 용기와 힘을 주었던 책의 한 구절을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그들은 끝내주게 멋진 문장을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이니까. 간장계란밥 같은 가벼운 문장이 아니라(그렇다고 제가 간장계란밥의 존맛탱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오랜 시간 푹푹 끓여낸 진국같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혼자만의 달리기를 계속해온 사람. 그 길에 끝에 무엇이 있는지 너무나 근사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을 등대 삼아 아직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나만의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


 어쨌거나 계속하는 나날들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느리지만 천천히, 사부작사부작.


혼자만의 달리기를 해온 시간이 어연 20년을 훌쩍 넘겼으니 학교에서 공부한 기간의 몇 배가 되고도 남는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 곁에 늘 좋은 선생님이 계셨을 리 만무하고 어느 누구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내 선택과 노력의 결과였고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언어를 몇 개씩 할 줄 몰라도 나름대로의 행복을 찾아가며 살아가겠지만 경험의 폭과 깊이에 있어 외국어를 배운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비교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인생을 최대한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비법 중 하나는 단연 외국어 구사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나의 경험을 토대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성숙하고 포용력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남들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비전을 갖게 되는 것은 물론 몇 배 더 많은 기회를 얻어 그야말로 풍요로운 삶을 빚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외국어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실은 가능하다는 것, 만약 실패하더라도 다른 옵션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당장 눈앞에 있는 것만이 나의 무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용기 낼 수 있게 해주는 것, 수족관에 갇혀 있다 바다로 나간 물고기 '니모'처럼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기회와 신나는 모험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말이다. 한마디로 '외국어의 힘'은 삶에 있어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할 때,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찾아낼 수 있는 미래를 향한 출구이자 한 줄기 빛이다.

손미나 저, <나의 첫 외국어 수업>
매거진의 이전글 그 누구도 아닌 내게 좋아 보이도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