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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Aug 15. 2021

그 누구도 아닌 내게 좋아 보이도록

타인은 지옥이다, 아니 지옥은 타인에 있다


 한국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바르샤바로 돌아오자마자 했던 첫 번째 일은 서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왜 그렇게 책 욕심을 부렸는지... 오랜만에 만난 모국어 책의 홍수에 정신을 못 차리고 나는 거의 매일 책을 사들였다. 결국 캐리어 5개에 아이들 책과 내 책을 합쳐 50여 권 정도 되는 책을 폴란드까지 이고 지고 왔는데 폴란드로 와 보니 가지고 있던 5천여 권의 책과 더불어 이미 집은 책의 홍수. 책장에 더 이상 남아있는 빈 공간이 없었다.  


 고민 끝에 식당 한 구석의 공간도 책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 책탑을 쌓았다. 거실 옆에 있는 10인용 식탁은 매일 식구들의 식사 공간으로도 쓰이지만 한편은 내 작업실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고(지금 이 글도 식탁에 노트북을 두고 쓰고 있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으레 응접실로도 쓰는 공간이기도 하다(대화를 나누기 전에 커피 한 잔씩 나누는 게 기본이니까). 탁자 위 커피머신과 와인홀더를 가장자리로 옮기니 그래도 2미터 남짓한 빈 공간이 생겼다. 그곳에 가지런히 책탑을 쌓았다. 



 구석진 책장 안에 살짝 숨어있는 책들과 달리 오픈된 공간에 책을 쌓아두려니 대체 어떤 책을 놔둬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집에 손님들이 오면 바로 눈에 띄는 공간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곳에 쌓인 책 제목을 훑으며 나라는 사람을 파악하려 들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신경이 쓰여 이것저것 손 닿는 대로 아무렇게나 책을 옮기는 게 아니라 책장에서 '디스플레이용' 책들을 엄선하기 시작했다. 너무 자본주의적 냄새가 나는 자기 계발서는 세속적으로 보이니 두지 말자('부의 추월차선'이라든지 '부의 시나리오'라든지). 아이 학습법이라든지 교육 지도서 같은 것들은 또 극성 엄마처럼 보일지도 몰라('공부머리 독서법'이라든지 '좋은 엄마가 좋은 선생님을 이긴다'같은). 너무 오래되었거나 시대착오적인 책들은 구식으로 보일 것 같아(이를테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든가). 기왕이면 표지가 예쁘고 심플해서 인테리어 효과가 나는 책들로 쌓아볼까. 아, 있어 보이게 원서도 몇 권 섞어보자. 


 이런 과정을 거쳐 색깔과 폰트와 제목에 공을 들인 책탑이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책만 올려두면 왠지 허전한 듯하여 분위기 좋아 보이게 가족사진도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사진을 올려두며 '이렇게 책 위에 액자를 두면 나중에 책을 꺼낼 땐 너무 불편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 


 문득 내가 한국에서 이 많은 책들을 폴란드까지 가지고 올 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떠올려 봤다. 적어도 인테리어 소품으로 가져온 책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책들로 뭘 하고 있지? 책으로 집을 열심히 꾸미고 있지 않은가. 


 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해서?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 L'efer, c'est les autres"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사르트르가 직접 이 유명한 문장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밝혔다. 흔히 인용하듯이 나를 괴롭히는 타인과의 나쁜 관계 때문에 지옥같이 힘들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모든 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정확하게 해석하자면, '타인은 지옥이다'가 아니라, '지옥은 타인에 있다'가 더 맞을 것이다. 

박혜윤 저, <숲 속의 자본주의자> 중에서


 책을 잘 보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내가 손쉽게 책을 찾아 읽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손님이 왔을 때 이걸 어떻게 바라볼까를 고민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좋아 보이기 위해 책탑에 공을 들인다는 걸 알았다. 


 내 개인적인 공간을 꾸미면서도 이렇게까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도 않고 언제 방문할지도 모르는 타인을 말이다. 나는 이 집에서 적어도 하루 중 스무 시간 이상을 보내는 사람인 반면, 집에 손님이 방문하는 건 많아봤자 한 달에 한두 번뿐이다. 그런데 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이렇게 공들여 책을 골라내고 있는 것일까. 


 그 순간 스쳐가는 손님이 아니라 내 눈에 좋아 보이게, 나와 내 식구의 눈에 좋아 보이게 집을 꾸미고 유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부엌 옆 그릇 장식장도, 냉장고를 빼곡히 채우는 관광지 마그네틱도 이상하고 어색해 보였다. 나는 순수하게 저 물건이 좋고 자주 곁에 두고 보고 싶어서 눈에 가장 잘 띄는 장소에 번듯하게 장식해 놓았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그럴싸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깨지기 쉽고 먼지가 쉽게 쌓이는 저 물건들을 왜 가장 두드러지는 장소에 모아두었을까. 


 아무리 예뻐도 그것을 유지하는데 내가 부담스럽고 힘들다면 일부러 그렇게 꾸며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진짜 내 공간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꾸고 관리하는 데 내게 부담이 되지 않고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그게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좋아 보이든지 간에 일단 내게 편안해야 한다. 남의 시선에 아무리 '있어 보인다' 한들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내게 좋아 보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여기는 내 집, 내 공간, 내 가족의 공간이니까.  


 그것이 나를 지키는 시선. 진짜 내 삶을 꾸리는 방법이라든 걸 책탑을 쌓다가 깨달아버렸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한국에서 이 많은 책들을 폴란드까지 가지고 올 때 책에게 바랐던 건 '일상의 소소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는데. 물론 이런 방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책은 어떻게든 그 물성 자체만으로도 삶에 도움을 주는 존재인 걸까. 물론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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