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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09. 2021

어쩌면 20년 전에 '스라러'였을 나의 이야기

스토리 라이브러리 방문기와 흑역사 대방출 에세이


이 도서관의 최대 과제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즐겁게 책을 고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서관을 운영하는 측 논리로 플랜을 짜게 되면 아무래도 관리하기 쉬운 것을 우선하여 서가를 배치하게 됩니다. 게다가 도서분류법을 따르면 수장되어 있는 책들이 무기질처럼 보이게 되죠. 이 도서관은 책을 찾는 곳뿐 아니라, 별생각 없이 와서 서가와 서가 사이를 걸어 다니기만 해도 즐거운 장소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장서가 햇빛에 변색되는 문제도 있지만, 역시 도서관은 다소 어두운 편이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않을까 합니다. 서가에는 미술관에서 사용하는 조명을 준비하고, 열람용 테이블에는 독서등이 있기 때문에 책 읽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일부는 쇼케이스처럼 만들어, 특별 기획을 할 때마다 배열을 바꾸는 거죠. 미술관이나 박물관, 학예원처럼 개가식 서가에 놓을 책을 전시품으로 생각해서,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 도서관 사서가 결정하는 겁니다. 망라해 모으는 것은 다른 도서관의 역할이고 이 도서관의 역할은 책과 만나기 위한 장소로 만드는 겁니다.
도서관에서 작가가 출연한 영상을 홀에서 상영해도 좋고, 영화화된 원작도 얼마든지 있겠죠. 책 전체에서 어떤 테마를 발굴하는 것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 종래의 도서관은 책 선택을 이용자에게 맡기는 수동적 시스템이었습니다. 책을 빌리러 오는 이용자에게는 찾는 책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니까요. 국회도서관쯤 되면 국가의 지적, 문화적 재산을 모두 소장하는 것이 최대의 역할이지만 이렇게 방대하게 책이 간행되고 있는 시대에 19세기의 도서관 같은 콘셉트로 하다 보면 사장되는 책이 늘어갈 뿐입니다. 이용자들이 이거다, 할 만한 새로운 제안이 필요합니다.
 
책 대출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미리 정해져 있습니다. 이 도서관은 파묻혀 있는 책들과 만나기 위한 장소입니다. 여기에서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해서 공공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고, 헌책방에서 사도 되죠. 열람용 의자와 테이블을 편하게 만들면, 일부러 도서관에 다니면서 책을 끝까지 읽어보는 즐거움도 생기죠. 이 도서관은 책 대출 서비스 기관이 아니라, 책과 기적처럼 만나기도 하고 독서를 위해 정리된 환경에서 질 높은 책 읽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장소로 만들고 싶습니다.


 위의 문장들은 모두 마쓰시에 마사시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한 챕터에서 발췌해 왔습니다.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는 등장인물들이 새롭게 조성될 현대 도서관의 디자인을 상의하며 '이 시대에 필요한 도서관의 역할은 무엇일지', 그리고 '이용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는 도서관이 좋은 도서관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이에요. 도서분류법을 따르지 않는 도서관, 다소 어두운 조명의 도서관, 책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책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도서관,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관련 영상을 상영하는 도서관, 방대하게 책이 간행되고 있는 이 시대에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제시하는 도서관, 그리고 책과 기적처럼 만나는 도서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공간인데, 심지어 소설 속에서도 아직 구현되지 않은 상상의 공간인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제 머릿속에는 어떤 장소가 선연하게 떠올랐습니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요?



사진출처 instagram @hello_storylibrary
photo by @seluetia




 지난 7월, 저는 스토리 라이브러리에 다녀왔습니다. 단순한 문장이지만 제겐 큰 의미가 있어요. 혜화동에 위치한 이 스토리 라이브러리는 오직 12세부터 19세까지의 창작자들을 위한 청소년 전용공간이기 때문이죠. 그런 공간에 서른여섯 살의 제가 다녀왔으니 특별할 수밖에요(자랑입니다). 물론 아이들이 직접 만든 공간이 아니라 어른들이 구상하고 설계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동안 관계자들은 수없이 드나들었겠지만 그 수는 한정적이니까, 어쩌면 지금까지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방문한 어른은 연필 한 다스는 넘겨도 계란 한 판은 넘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난 7월 그 행운을 누리는 어른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단순한 문장이 제게 또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한때 스라러(스토리라이브러리er)였기 때문이죠. 스토리 라이브러리가 생기기 한참 전인 무려 20년 전에 청소년기를 보낸 제가 왜 스스로를 스라러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요? 오늘 글에서는 제 개인적인 흑역사를 마구 털어놓으며, 청소년 창작자로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아, 물론 스토리 라이브러리 이야기도요.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방문하기 전, 씨프로그램의 미국 특파원인 실비아 님과 청소년 시기의 창작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때 소설을 열심히 쓰는 10대였거든요. 제가 처음으로 완성한 소설은 '어느 음유시인 이야기'라는 제목의 짧은 단편소설로, 온라인 공간에 처음 그 소설을 게재했던 건 2001년 7월,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눈물을 흘리는 갈대'라는 이름의 장편소설을 온라인 공간에 공동 연재했었고, 개인 노트에 '리안의 일기'라는 소설을 끄적이기도 했었지만(왠지 소설 제목이 오글거려 보인다면 매우 정상입니다) 둘 다 장편소설이라는 특성상 완결을 보지 못하고 흐지부지해진 채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주는 창작공간, 스토리 라이브러리를 방문하니 그 시절 그때의 추억과 이야기가 정말 물밀듯이 쏟아지더군요. 내가 열여섯 살 때 만약 이 공간을 방문했다면, 과연 이 장소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 공간에서 나는 그 장편 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이곳에서 나는 나의 독자를 만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공간을 사랑했을까? 이곳에서만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10대의 나는 어떤 창작자였나... 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0대의 제가 이 공간을 방문했다면, 과연 저 종이에 어떤 이야기를 담아갔을까요?


  그 당시 저의 창작공간은 온라인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모두가 생애 처음으로 이메일 계정을 하나씩 만드는 그 시절에 저는 당시만 해도 네이버를 한참 앞질러 갔던 포털사이트 다음 Daum에서 소설 창작동호회를 하나 운영했어요. 판타지 소설을 주로 쓰는 카페였지만, 회원들은 장르 구분하지 않고 온갖 다양한 글을 게시하며 서로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학교 백일장에서 상을 탄 글을 올리기도 했고, 소설과 어울리는 삽화를 그려서 공유하기도 하고, 제가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의 감상문을 올리기도 했지요. 열다섯, 열여섯 살의 저는 현실세계보다 그 온라인 공간에 더 푹 빠져서 매일매일 온라인 카페에 출석도장을 찍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 브런치를 포함해서 모든 소셜미디어에서 쓰는 제 아이디 세르티아seluetia는 그 시절 제 필명이기도 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주로 쓰는 아마추어 소설가의 허세 가득한 이름이군요(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오늘 글은 흑역사 대방출 에세이입니다). 서로의 소설에 '감평'이라는 이름으로 소설보다 더 긴 감상글을 남겨주기도 했으니 또한 아마추어 평론가이기도 했을까요? 다행히 다음이라는 포털 사이트가 오랫동안 굳건하게 남아줘서 저는 20년 전에 제가 쓴 소설 및 온갖 잡글들을 다시 다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무난해 보이는 소설로 하나 퍼왔습니다. 대부분의 장르는 SF와 판타지, 게시글 연도는 2001년.


  그때 나는 무슨 생각으로 소설을 썼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있었지? 매일매일 내가 이야기를 만들고, 기록으로 남기고, 그리고 그것을 읽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왔지? 이런 질문들을 20년 전의 저에게 건네며 그 시절에 쓰던 글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려 몇몇 기억들은 많이 흐려지고, 내가 이런 글을 썼었나 싶게 생소한 글들도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며칠 전, 저녁식사 시간에 11살 큰아이가 제게 묻습니다. "엄마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저는 초등학생 때는 화가가 꿈이었고, 중간에 잠깐 만화가를 꿈꾸다가, 중학교에 갈 무렵부터 꿈이 작가로 바뀌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엄마 꿈이 나랑 똑같네."하고 답하던 딸은, "그런데 평소 엄마가 쓰는 글은 내가 쓰는 글이랑 전혀 다르잖아. 나는 이야기를 만드는 게 재미있는데, 엄마는 일기 같은 글을 쓰더라고."하고 말합니다. (엄마 글은 재미없어!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한창 중학교 시절에 쓰던 판타지 소설을 읽던 차라 딸아이 말에 반색하며 대답했습니다. "엄마도 예전엔 이야기를 썼었어! 지금이야 에세이를 많이 쓰지만 더 어릴 때는 만화도 그리고 소설도 썼었지." 그러자 딸아이가 그럼 왜 지금은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어, 그러게. 언제부터 소설 쓰기를 멈췄을까? 그렇게 좋아서 매일매일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딸아이는 엄마가 뭐라고 대답할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며 자문자답(?)을 하더군요.


"이젠 어렸을 때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않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지요....?"


참고로 내년부터 스토리라이브러리 출입이 가능한 저희 딸은 이런 걸 그립니다. 귀여운 예비스라러.




 헐. 딸아이의 대답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리고 너무 정확해서 한참을 멍 때린 듯한 표정으로 벙쪄 있었습니다. 그러게요. 정확합니다. 그때만큼 이야기를 상상해내는 게 즐겁지도 않고, 재료가 풍부하지도 않고, 또 무엇보다 어떻게 끝맺음을 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그즈음 해서 조금 더 실용적인 직업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철이 든 걸까요, 사춘기가 끝난 걸까요, 아니면 제 안의 창조적인 영감은 거기까지였던걸까요. 더 이상 오로지 즐거운 마음 하나만으로, 열성적으로 습작을 쓰며, 스스로를 아마추어 소설가라고 부를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질 수 없게 된 거예요.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이 될 무렵, 더 이상 장래희망 목록에 '작가'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를 써넣었던 희망학과 칸에 신문방송학과, 정치외교학과 같은 실리적인(?) 이름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티스트 웨이>의 작가 줄리아 카메론이 그녀의 책에서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신문이나 광고 계통에서 일하는 경우도 많다. 꿈꾸던 소설가의 길을 걷는 대신 그곳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이거 이거 너무 내 이야기다, 하며 밑줄을 진하게 그었어요. "어떤 꼬마가 직업적인 아티스트가 되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재능에 대해 분별 있게 판단하기보다는 실용을 기준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에도 밑줄을 그었고요.


 아주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어느새 저는 다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있지만, 딸아이가 말한 대로 재미없는(??) 글을 쓰는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10대 때 쓰던 오글거리는, 흑역사 중에 흑역사 같은 그 소설들을 보며 생각했어요. 지금의, 서른여섯 살의 나는 절대 쓸 수 없는, 열여섯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이 공간에 잔뜩 모여 있다고. 열여섯의 내가 쓸 수 있는 글과, 스무 살의 내가 쓸 수 있는 글과, 서른여섯, 혹은 마흔의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다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 시기가 지나가버리면, 그 이야기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미숙하게만 표현된 것 같아 부끄러워 보이는 글일지라도 '나'라는 사람 속에서 나온 단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가 20년 전 쓰인 글 속에 있었습니다.




  10대에만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그렇다면 스토리 라이브러리는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스토리 라이브러리에는 창작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줄, 손을 근질근질하게 만들어줄 다양한 재료 도구들이 있지만 오늘은 도서관 이야기로 첫 글을 시작한 만큼, 그리고 '라이브러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공간인 만큼 이곳의 책과 콘텐츠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재료 도구에 대해서는 열여섯 이전에 있었던 열세 살의 아마추어 만화가 자아가 튀어나오면 그때 또 그 시절의 흑역사를 방출해보도록 하죠. (만화도 소설 못지않게 아주 오글거려서 너무 재미있거든요.)

스토리 라이브러리의 다양한 재료도구들. 사진출처 instagram @hello_storylibrary


 소설 쓰기에 한창 열을 올리던 그 시절, 용돈을 알음알음 모아 교보문고에 가서 '소설 창작법'이라는 연두색 표지의 책을 사 왔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대부분의 용돈을 동네 책 대여점에서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과 무협지 대여로 탕진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집에 두고두고 볼 수 있는 실용서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당시로는 꽤 큰돈을 들여 전공서를 샀었어요. 중학생의 책장에 어울리지 않게 대학 전공서가 한 권 꽂혀있으니 단번에 그 책이 방청소를 해주시던 어머니 눈에 띄었는데요, 어머니는 그때 제게 뼈 있는 한마디를 날리십니다.

"소설을 잘 쓰고 싶으면 이런 책을 사서 볼 게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많이 읽으렴."


 두둥. 그 당시의 저는 좋은 작품은 이미 차고 넘치게 많이 읽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다시 되짚어 생각해보니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턱없이 부족했었습니다. 아니, 양적으로는 그래도 나름 충실했었는데 (책 대여점에 가산을 탕진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무엇이 좋은 작품인지 식별할 수 있는 눈이 없었고, 여기서 조금 더 좋은 방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방향을 향해 무엇을 쌓아 올려야 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 같아요. 당시에는 판타지 소설에 덕력을 뽐내던 시기였는데, 톨킨의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은 너무 어려웠고, <해리포터> 같은 작품은 너무 트렌디했고(그때 막 첫 번째 영화가 개봉하던 시절이었거든요. 라떼는...) 막 인터넷 소설의 열풍의 기대어 한국식 판타지 소설이 와르르 쏟아질 때라 대중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은 많았지만 어떤 영감을 주는 소설, 내 이야기의 뿌리가 될 수 있는 책을 만나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는 또 제 나름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치우느라 바빠서 전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쉬움이 많습니다.


 흔히들 인생 책이라고 부르는,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달라지는 이야기들이 있죠. 제 안의 본질적인 일부가 되는 이야기, 이야기를 창작하고 싶다는 기대감, 흥분을 일으키는 이야기, 그리고 구체적인 창작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능력이 생기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지금 되돌아보면 그런 큰 감명이나 울림을 준 이야기를 만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 이야기는 과연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스토리 라이브러리에 가시면 그런 책을 만날 수 있어요!"라고 멋들어지게 적고 싶지만... 그것은 아쉽게도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므로 그렇게 쓰지 않겠습니다. 아마 모두에게 그 책은 다 다른 장르의, 다른 작가의, 다른 서가에 있을 테니 모두가 다 그런 책을 10대에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 공간을 꾸려나가시는 분들이 청소년 창작자들에게 그런 책을 만나게 해 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은 여타의 다른 도서관과는 조금 다르거든요.


 먼저, 책 전체에서 어떤 테마를 발굴하여 그에 따라 책을 진열하고 있습니다. 앞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에서 스토리 라이브러리와 일맥상통하는 문장들을 발췌해서 소개한 바 있는데요, 이 도서관은 도서분류법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 스토리 라이브러리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어요. 서가의 책은 기획성 있게 선정해서 배열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테마일 수도 있고, '창작'이 테마일 수도 있고, '영화화된 책', '채식주의자의 책', '청소년이 쓴 책' 등등 테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도서 선정위원과 같은 외부 전문가가 이 과정에서 참여하기도 하고요, 공간을 함께 꾸려나가는 청소년들에게 직접 그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제3의 어른이 있습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제가 10대였을 때도 저의 창작자로서의 열정을 지지해주는 몇몇 어른들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나 현실에서의 직업은 대치동 학원강사였던 비운의 이 모 선생님인데요, 제가 쓰는 소설을 정말 꼼꼼하게 읽어보시며 전체 설정에서부터 세세한 문장까지 하나하나마다 진지하게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죠, 중학생이 운영하는 온라인 판타지 소설 창작클럽에서 그분은 왜, 어떤 이유로 저희들의 신나는 창작놀이를 지켜봤던 걸까요? 실제로 온라인 카페에서 만나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던 다른 창작자들 중에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는 대학생도 있었고, 아이를 키우는 가정주부도 있었는데요, 열다섯, 열여섯의 제가 쓰는 그 오글거리는 문장들을 진지하게 읽고 제 열정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게, 지금 제가 그들의 나이가 되어 다시 생각해보니 참 신기해요. 가끔씩 툭툭, 이 책 한번 읽어봐라, 이 영화 재미있다, 하며 제가 쓴 글에 남겨주던 댓글들. 20년 만에 그 온라인 카페에 되돌아가 댓글들을 하나씩 읽어보는데 신기하면서도 재미있기도 하고, 다들 어디서 어떤 어른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런 어른들이 있어서 저는 더 신나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막상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한테는 어휴, 부끄러워서 절대 글을 꼭꼭 숨겼었어요. 스토리 라이브러리에서는 청소년 작가들의 열정을 진지하게, 그리고 꾸준히 지지해주는 멋진 어른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작가님'이라 불러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도와주고, 다양한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어린 아티스트들의 열정에 불을 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들이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동료 창작자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오직, 12세부터 19세까지의 창작자들을 위한 청소년 전용공간이니까요. (그러나 저도 매우 함께하고 싶습니다. 매번 탐나는 프로그램들이 어찌나 많던지. 마음만은 10대의 출입.... 안 되겠죠.)


 저는 이야기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를 읽어주는 좋은 독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좋은 이야기가 있다면 서로 알아볼 수 있고, 그곳에서부터 또 다른 싹을 틔우는 이야기의 후계자들 말이죠. 제가 10대 때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건 함께하는 창작자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어느 순간 더 이상 이야기를 쓰지 않았던 건 입시나 군입대, 혹은 생업과 같은 각자의 이유로 우리는 그 공간을 떠났기 때문에 더 이상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서로 좋아하는 책을 추천하기도 하고, 내가 그은 밑줄 위에 또 그어진 밑줄을 보며 반가워하기도 하고, 각자가 상상하는 세계관에 흥미를 가지고 여러 질문을 던져주기도 하는. 그리고 때론 함께 영화를 보고, 수다를 떨고, 덕력과 좋아하는 마음을 맘껏 뽐내는 그런 친구들 말이죠. 그런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눌 힘을 얻습니다.


 스토리 라이브러리에 가면,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마 가능하리라고 보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은 어떠신지요? 스토리 라이브러리가 20년 전에도 있었다면, 저는 계속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자로 남을 수 있었을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최근에 읽은 책에서 발견했던, 스토리 라이브러리에 꼭 들려주고 싶었던 문장을 하나 공유하며 글을 끝맺어볼까 합니다. 좋아하는 책 속의 문장을 함께 나누는 것이야 말로, 제일 스라러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하니까요. 20년 전이었다면 스라러였을 저의 자아가, "어머 이 이야기는 꼭 나누고 싶어!" 하고 소리쳤던 문장입니다.


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 앞에는 언제나 언어와 이야기가 있어왔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의 심장에서 나온 살아 있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한 사람의 좋은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좋은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 '부드럽게' 각인되고 남아서 우리의 자아를 바꾼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드러움 중 가장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러운 것은 인간의 변화다.

우리 존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만큼이나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고 무엇을 상상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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