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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Oct 13. 2021

세상은 슬프지만 우리에겐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정혜윤,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언젠가부터 나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놓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나는 3년 전부터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데에는 주재원인 남편의 역할이 컸고, 나라라든지 시기라든지 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에 내 의지는 조금도 개입될 수 없었기에 나는 무기력했다. 폴란드에 온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에 상륙했다. 모두가 '거리두기'에 힘겨워하며 저마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걸 답답해할 때 나는 새삼스러울 것 없이 똑같은 일상에 덤덤해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나는 타국에서 홀로 외따로 떨어진 섬처럼 갇혀 있었으니까. 낯선 언어, 낯선 환경을 무서워하며 폴란드 현지 유치원에 적응하기를 포기한 둘째는 이미 코로나가 발생하기 1년 전부터 나와 스물네 시간을 함께 붙어있었고,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생활 반경만큼만 내 세계가 확장될 수 있었기에 삶의 제약이 많았다. 나 혼자 건사하기에도 언어, 문화, 인종, 그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았다. 하물며 여덟 살 큰아이부터 두 살 막내까지, 타국에서 홀로 세 아이들을 돌보며 새로운 환경에서 삶을 온건하게 붙들고 살아간다는 건, 때때로 많이 버거웠다.


 책과 글이 없었다면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모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국어로 쓴 문장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만큼은 수많은 국경선 너머 외따로 떨어진 내 작은 섬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내 작은 세상이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먼 곳에서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씩 떠올랐다.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늘 마음 한 구석에 있었지만 막상 책상 앞에 앉으면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몰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힘드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샘물처럼 퐁퐁 솟아올랐다. 쓰고 싶다는 열망이 왈칵 올라오는 글이 생길 때마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 꾹꾹 차오를 때마다 조금씩 생각을 글로 옮겼다. 빈 커서만 깜빡거리던 공간에 단어들이 하나둘씩 쌓여 문장이 되고, 그 문장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라는 실체로 완성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무언가 내 속을 쿡, 하고 찔렀다. 꾸준히 글을 쓰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다. 그렇게 1년, 2년... 시간과 글이 차곡차곡 쌓이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나는 '폴란드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의 글을 읽고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글을 쓰는 공간은 안전하게 내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믿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폴란드 교민사회의 크기는 미비하기 때문에,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골치 아픈 일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일부러 내 글을 찾아 읽었고, 또 누군가는 그 글에 기반해 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글은 글쓴이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조각을 꿰매어 만들어낸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어떤 부분, 글을 쓰기 이전까지는 내 속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어떤 조각을 차근차근 꿰어 낸 것이다. 어쩌면 글이야말로 나의 핵심적인 부분일 수 있다. 글에 담긴 내용은 분명히 내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패치워크는 진실을 재료로 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에 실린 내용이 나의 전부가 아니며 또한 나의 겉모습과도 다르다. 그러나 그 천조각을 휘둘러 보이며 나를 '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심지어 이런 글을 쓰다니 너는 이상하다, 우리와 다르다, 잘난 척하지 마라, 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다.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 아주 작은 공동체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 시선과 목소리를 견디고 계속 내 이야기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일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를 제지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왜 이야기를 하려 하는가, 이렇게까지 굳이 쓰고 싶은 글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할 수밖에 없었고 자기 검열의 늪에 빠졌다. 때론 무서웠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그것이야말로 지는 것 같아서 더 굴복하기 싫은 마음이 뒤섞였다. 이런 현실에 많이 지쳐있을 때,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는 책을 만났다.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아무도 없는 바다일지라도 작은 물고기나 금지 어종은 풀어주는 어부, 일흔여덟 살에 처음 글자를 배우고 ‘귀가 배지근해지도록’ 열성적으로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할머니, 누군가를 만날 때 상대가 지고 있는 '무게'를 먼저 가늠하는 낚시꾼, 시장 야채장수 언니를 멘토라고 말하는 떡집 아줌마와 그녀의 인생 멘토 야채장수 언니. 그뿐만 아니라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불에 타버린 딸아이의 뼈를 만졌던 손으로 해바라기를 수놓는 엄마, 세월호에서 아들을 잃은 아빠와 911 테러에서 형을 잃은 동생, 그리고 희생자의 숫자를 이야기하며 그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모두 자기 인생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목소리들. 총기 사건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컬럼바인 총기사건의 생존자, 자식을 어떻게 키운 거냐는 멸시를 딛고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고 외치는 총기사건 가해자의 엄마…. 어찌 보면 소박한 사람들, 또 어찌 보면 이상한 사람들, 그리고 이 슬픈 세상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단어를 찾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열성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가 가진 섬세하고 다정한 필치로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슬픈 세상에서 이상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는 이 다정하고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세상은 서로의 차이를 서럽도록 강조하고 우리는 서로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고 그 사이에 시간은 오싹할 만큼 창백하고 차갑게 흘러가지만, '우리'가 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타인은 힘겨운 지옥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제나 고독을 뚫고 나오게 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다. 사실,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도 우리가 혼자라고 생각해서 아닌가? '우리'가 되면 내게 일어난 많은 일은 내게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다. 한때 혼자서만 슬퍼했던 경험이 공통의 경험이 된다. 거기서 나는 내가 아닌 척할 필요가 없다. 훨씬 더 이상적인 나인 척할 필요도 없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행동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내가 누군가를 환영한다면 나 자신도 환영하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일 때는 드러나지 않았던) 저마다의 숨겨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단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 나누고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나누는 것이 치유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8쪽


 작가는 책의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당신을 당신으로 만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당신이 멈추지 않기 위해 필요로 했던 이야기도 들려달라. 두꺼운 고독을 뚫고 나오게 했던 존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달라. 당신의 고유한 기쁨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나는 살아 있는 자의 귀로 듣겠다.” 


 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묻는 작가의 목소리에 또다시 울컥, 마음속에서 단어들이 요동쳤다. 작가가 내밀어준 손을 꼭 잡고 내 속에 담긴 나의 조각들을 쏟아내고 싶었다. 나의 말, 나의 단어, 나의 이야기. 우리가 모두 세상을 정혜윤 작가처럼 바라보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크고도 작은 세상에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계속 말할 것이다. 위험에 처한 생명에 대해서. 살고 싶게 만드는,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각자가 숨기고 싶었던 어둠을 뚫고. 그리고 우리가 서로 더 잘 듣고 더 잘 말하고 더 잘 알게 되면 확실히 이 세상에 위안과 아름다움은 존재할 것이다." 작가의 이 문장은 마치 내게 이렇게 들렸다. 내가 너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갈게. 그러니 너도 용기 내서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렴. 너의 이야기를 듣고 또 삶의 용기를 되찾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거야. 사람들이 소박한 이야기나 슬픈 이야기에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렴. 나는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자신의 단어와 이야기를 길어 올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기대어 나는 글을 쓴다. 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세상은 여전히 슬프지만, 우리에겐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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