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오랫동안 산타를 믿을 줄은 몰랐지
"누나, 산타는 진짜 있어. 왠지 알아? 선물 포장지에 산타 그림이 있었거든!!"
어젯밤, 저녁밥을 먹다 말고 막내아들이 말했다. 멈칫.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산타의 존재를 확신한다니. 그러나 다섯 살 막내의 그 순진한 믿음이 좋았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더욱 완벽한 산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오늘 바로 마트에 달려가 산타 얼굴이 떡 하니 그려진 포장지를 사 왔다. 아,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얼른 포장지를 숨겨야 한다.
누군가는 집에 굴러다니던 포장지로 선물포장을 했더니 아이들이 단박에 엄마 아빠가 준비한 선물인 줄 눈치를 채더라며, 선물 포장지를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덕분에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아이들 몰래 새 포장지를 사서 매년 다른 포장지로 선물을 포장하고, 남은 포장지는 몰래 버린다. 발각되면 안 되니까. 아까워 죽겠지만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집에 계속 놔둔다 한들 그 무엇도 포장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저 멀리 북극에서 산타가 사용했던 포장지니까. 아마 나 같은 부모가 많아서 매번 12월만 되면 마트에 그렇게 선물 포장지가 넘쳐나나 보다.
혹여라도 아이들이랑 자주 가는 마트에 가서 포장지를 사 오면 아이들이 엄마가 사 온 포장지라고 의심할까 봐 집에서 30분 거리에 멀리 떨어진 다른 마트에 가서 색다른 디자인의 포장지를 사 오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피곤하다.
다음 주면 어느새 겨울방학이다. 방학이 시작하고 아이들과 스물네 시간 붙어 지내는 상황이 닥치면 아이들 '몰래' 산타 선물을 준비하는 게 어려우니 이번 주에 만반의 준비를 마쳐야 한다. 미리 온라인 쇼핑몰에서 선물을 주문하고, 멀쩡한 집을 놔두고 택배를 굳이 무인 수거함으로 보내 수령하고, 포장을 하고,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날까지 잘 숨겨둬야 한다. 그간 옷장에 맨 위칸 가장 깊숙한 공간에 숨겨왔기 때문에 아직까지 아이들에게 선물이 발각된 적은 없는데 이제는 어느새 키가 150센티까지 자란 큰 아이를 경계해야 한다.
아니 잠깐, 경계를 해야 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이제 알 거 다 아는 나이에 서로 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야 할지 고민스럽다. 키가 무려 150센티미터. 어느새 한국 나이로 열 한살. 해가 바뀌면 열 두살. 나는 산타가 사실은 부모님이었다는 사실을 10살에 알았다. 물론 오빠의 스포가 아니었다면 한두해는 더 연장될 수도 있었겠지.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진짜 믿었는데 3학년때는 의심을 했고 4학년때는 그냥 다 터놓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11살 이 아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아직 산타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을까?
12월이다. 다섯 살 막내와 일곱 살 둘째의 관심사는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 과연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가 내가 원하는 선물을 가져다주실지 매일, 엄청, 항상 궁금해한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저녁식사 때마다 산타 이야기가 화젯거리로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이 거짓말쟁이 뻥쟁이 엄마는 마음이 간지럽고 이 자리가 불편하다. 도망가고 싶다. 꼬맹이들만 있으면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만들고 그럴싸한 뻥도 이것저것 치겠는데, 아무래도 대놓고 그러기엔 11살 큰딸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빤히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앞에서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엄마라니. 너무 비도덕적이다.
얘는 동생들의 대화를 어떻게 듣고 있나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딸아이 눈빛을 살핀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인다. 동생들의 대화엔 끼어들지 않는다.
저런, 저건 아무래도 '진실을' 아는 자의 표정이다.
얼마 전엔 큰아이가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 친구는 산타를 더 이상 믿지 않는데, 동생 때문에 믿는 척해야 돼서 너무 괴롭대."
아니 뭐라고. 친구들끼리 그런 얘기를 주고받는단 말이야? 그리고 이걸 나한테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유는 뭐지? 그렇다면 자기도 더 이상 산타를 믿지 않는데 동생들 때문에 믿는 '척'을 해준다는 걸까?
나는 기왕지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대놓고 딸아이한테 물어봤다.
"너는 산타를 믿어?"
"나는 내가 산타를 아직 믿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
.... 응? 이건 또 무슨 귀신 시나락까먹는 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