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싼밍 아웃은 언제쯤 2

지난 10년 간의 산타 미션 이야기

by 주정현


지난 10년간 엄마로 살아오면서 산타클로스로 변신해서 선물공세를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가.

생각해보면 빨간 원피스 입고 성탄미사 다녀오는 게 전부였던 만 7개월의 크리스마스가 제일 편한 크리스마스였다. 마음의 준비도 할 새 없이 바로 그다음 해 크리스마스 때부터 산타 선물을 준비할 것을 '강요'받았으니 말이다. 첫째가 만 15개월 때 나는 임신 전에 다니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복학했고, 아이는 아직 어린 나이에 어린이집에서 단체 생활을 시작했다. 12월이 되자 어린이집에서 다음과 같은 공지를 보냈다.


산타 잔칫날 아이가 받을 선물을 각 가정에서 준비해서 교사에게 전달해주세요.
아이들마다 선물 크기가 비슷해야 하니 면적이 A4 사이즈 내외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선물 포장을 해서 저희에게 전달해주시되 아이가 모르게 전달해주셔야 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같이 등원하는데, 현관문에서 아이가 모든 걸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 모르게' 선물을 전달하지? 어린이집 가방 외에 다른 물건을 전달한다면 아이가 의아스럽게 생각할 텐데. 우리 집 아이야 아직 어리니 어물쩍 넘어간다 해도 네다섯 살만 돼도 뭐가 뭔지 코치코치 캐묻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도 어릴 때 유치원에서 산타클로스 분장을 한 가짜 산타클로스(a.k.a 원장 선생님 남편)가 매해 겨울마다 선물을 줬었는데... 우리 엄마도 이런 캐난감 미션을 극복해가면서 나를 키웠단 말인가?!


분홍색 루피(뽀롱뽀롱 뽀로로에 등장하는 비버 캐릭터) 인형을 포장하면서, 그리고 그 포장된 선물을 시커먼 검은 비닐봉지로 한번 더 감싸면서, 그리고 그걸 또 형태를 감추기 위해 종이봉투에 담으며 나 어릴 적의 산타 이벤트를 떠올렸다. 약간 감개무량하기도 했다. 첫 산타 선물을 준비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아, 이런 게 다 부모가 되는 과정이구나. 이렇게 산타가 대물림되기 때문에 산타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거구나. 기왕지사 한번 시작했으니 앞으로 매년 잘 챙겨줘야지.


그리고 가능한 한 절. 대. 들키지 않으리.


... 그렇게 매년 치밀해져 가는 산타 미션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네 살 때 미국으로 이사를 갔다. 그맘때 한창 공주에 푹 빠져 있었던 딸아이는 미국에서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디즈니 오로라 공주 인형'을 받고 싶다고 했다. 어렵지 않은 미션. 아마존에서 오로라 인형을 검색해서 마론인형을 하나 사다 감춰두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아이의 소망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잠을 잘 때 껴안고 잘 수 있을만한 오로라 인형을 원한다는 것이다. 음? 마론인형은 아무래도 너무 딱딱하고 뾰족해서 잘 때 안고자기엔 별로인데? 다시 인터넷 쇼핑몰을 (조금 더 정성스레) 검색해서 안고 자기에 괜찮을 것 같은 조금 통통한 베이비돌을 샀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날이 더 가까워진 어느 날 아이는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닌가.


"산타할아버지가 밤에 안고 잘 수 있는 폭신폭신한 오로라 인형을 선물로 주시겠지?"


아니 잠깐 뭐라고. 안고 잘려면 사이즈만 적당해야 하는 게 아니라 폭신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디즈니 공주 인형 중에 폭신하고 부드러운 봉제인형이 있나?


온라인 쇼핑몰을 검색해봤지만 폭신폭신한 공주 인형은 찾을 수 없었고, 에라 모르겠다, 위시리스트에서 조금 벗어난다 해도 크게 지장은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완벽한 산타의 선물'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월 22일인가 23일이었던가. 크리스마스 직전에 놀러 갔던 캘리포니아 디즈니랜드에서 나는 문제의 그 폭신폭신한 오로라 공주 인형을 발견하고 말았다.


헉, 진짜 봉제인형이 있었다니. 저건 당장 사야 해!


그런데 지금 놀이공원에서 아이랑 초밀착초밀접 붙어있는데 어떻게 저 인형을 아이 '몰래'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내 신경은 디즈니랜드도 퍼레이드도 놀이기구도 아닌 온통 그 봉제인형을 사야 한다는 산타 미션에 쏠려있었다. 그리고 오직 나만, 산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부모는 두 명인데 오직 나만 그 인형을 신경 쓰고 있었다. 아이가 소망하는 산타 선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선물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지, 지금 여기 현장에서 꼭 사지 않으면 온라인숍에서 구할 수 없는 희귀 템인지 같이 있던 남편은 전혀 몰랐다. 일단 그는 기념품 가게에서 그걸 보지도 못한 것 같았다. 산타 미션에 대한 진지함과 관심의 정도가 나와 달랐다고 할까. 남편에게 나의 작전을 설명하다간 눈치 없는 남편이 아이 앞에서 또 이상한 헛소리를 하고('뭘 사야 한다고? 오로라 인형?' 따위의 대사를 엄. 청. 크게 또박또박 얘기하겠지...), 또 그러다가 아이에게 홀라당 들켜버릴 것 같아서 이 문제는 나 혼자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아이 좀 봐줘."


하며 급똥을 가장한 체 디즈니 기념품샵으로 달려간 건.... 나만 아는 이야기.


덕분에 그 해 겨울에 오로라 공주 인형은 세 개나 사게 되었고, 이미 사둔 인형을 버리기는 아까우니 산타클로스는 폭신한 봉제인형을, 엄마 아빠는 딱딱한 인형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게 되었는데... 아이가 원하는 건 역시 봉제인형이었기 때문에 엄마 아빠에 대한 감사는 수직 급하락 하고 산타할아버지의 인기만 급상승했던 슬픈 크리스마스였다.


그때 알았다. 아, 부모의 돈과 시간과 노력을 모두 훔쳐가서 혼자 승승장구하는 산타클로스는 참 치사한 존재구나.


결국 우리집엔 오로라 공주 인형이 세 개나 있게 되었다...




산타 미션은 한국, 미국, 그리고 폴란드 국경을 넘나들며 수행되었다. 연말에 여행을 가거나 겨울철에 거주지를 옮기더라도 예외없이 산타는 우리가 있는 호텔, 임시숙소, 이사간 집으로 따라왔다. (매번 그걸 미리 주문해서 포장해서 편지까지 써두고 여행가방에 들키지 않게 몰래 숨겨가서 또 이브날 밤에 새벽에 부시시 일어나 아이를 깨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선물을 꺼내는 나의 눈물나는 이야기는.... 할말하않.) 때로는 영어로 된 편지가, 또 언제는 한국어로 된 편지가, 또 언제는 (구글이 검색해준) 폴란드어 편지가 함께 동봉되기도 하였다. 덩달아 선물도 이리저리 국경을 넘었다. 정말 산타가 실재했다면 그랬을 것처럼.


큰 아이가 여덟 살이던 해, 그해 12월에 우리는 폴란드로 이사를 왔다. 아이는 그맘때부터 살짝 산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간 한국 유치원에서 누가 봐도 허술한 분장의 가짜 산타들을 수없이 봐 왔기 때문이다. 시내에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자 정말 북유럽에 살 것 같은 리얼 비주얼 100%의 산타를 만날 수 있었지만, 아이는 그 산타를 보고서도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엄마, 크리스마스 마켓에 있는 산타할아버지는 진짜 산타야? 한국 유치원에 왔던 산타 할아버지는 가짜 수염을 달고 있었는데 저 할아버지 수염은 진짜 같았어. 진짜 산타처럼 생겼잖아. 여기는 가짜 산타 아니고 진짜 산타가 와? 근데 그러면 저 산타한테 내가 원하는 선물을 어떻게 얘기하지? 나는 폴란드어를 못하는데?"


외국으로 막 이사를 온 복잡한 상황과 더불어 낯선 나라의 산타를 신뢰할 수 없었던 걸까. 오랫동안 살던 한국 집을 떠나 멀리 이사한 직후였고, 아직 선편으로 보낸 이삿짐이 도착하지 않아 집에는 아무 세간살이도 없이 휑하던 터였다. 그런 환경에선 원하던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넌지시 말했다. 우리 집에 세간살이가 없는 것과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어쩌면 아이는 그때부터 산타의 선물 여부는 부모가 그걸 준비할 여력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는 걸 눈치챈 게 아니었을까.


그래도 8살은 아직 허술하고 귀여운 나이였다. 아이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사실 출국 직전에 어느 날엔가 엄마한테 살짝 기대하는 선물이 무엇인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책이었다. 그러나 일단 폴란드에는 한국어 책이 없으니까. 그러니 폴란드 산타는 내가 원하는 선물이 뭔지 전혀 모르겠지... 하며 진짜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무슨 선물을 받고 싶은지 편지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용의주도했던 나는 사실 한 달 전에 그 책을 몰래 구매해서 여행가방 맨 아래에 숨겨왔던 참이었다. 그리고 세간살이 하나도 없는 빈 집 옷장에 꼭꼭 숨겨두고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짜잔 하고 보여주었다. 이것이야말로 산타의 마법! 아니, 폴란드에 있는 산타클로스가 어떻게 내가 원하는 이 책을 딱 하고 선물해줬지? 의아해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대충 이런 추측성 답변을 내놓았다.


아마, 핀란드 산타마을이 본사인 산타 컴퍼니가 있는데, 각 나라 지점마다 산타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폴란드에 사는 한국인인 우리가 갖고 싶은 선물은 폴란드에서 팔지 않으니까 폴란드 산타가 한국 산타에게 협업을 요청한 거지. 그럼 한국 산타가 선물을 구해서 보내주고 그걸 폴란드 산타는 배달만 하는 거야.


... 그야말로 주재원 가족이 할 만한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덕분에 8살 때까지 아이는 철석같이 산타를 믿었다. 그랬던 아이는 다시 9살 겨울 무렵부터 산타의 존재를 진지하게 의심하였다. 아무래도 너무 비과학적이라 그런가. 그맘때쯤 아이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을 구분할 줄 알았고, 그래서 산타클로스와 이빨요정의 현실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나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한 바와 같이 일단 머리맡에 선물이 놓여 있는 그 물리적인 실체에 대해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산타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서 자신이 갖고 싶은 선물을 절대 절대 절대 말하지 않고 그 일급비밀을 자기 혼자서만 속마음으로 꼭꼭 간직했는데...


그래서 그랬나. 안타깝게도 그해 겨울에 온 산타는 아이가 바라는 선물을 주지 못했다.

(내가 그해 겨울에 뭘 선물해야 하나 얼마나 내적 갈등과 고민 속에 휩싸였는지... 굳이 밝히지 않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싼밍 아웃은 언제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