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어느새 그 모습을 하고 있는 30대의 나

by 주정현


오분간

나희덕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빡 지나가버릴 생(生),

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치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나는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시를 읽다가 코 끝이 찡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시를 필사하며 가장 처음으로 떠올랐던 건 만삭의 배를 하고 돌쟁이 유모차를 끌고 큰아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던 그 시간이었다. 신혼시절을 보냈던 아파트 단지의 공기라든가 정취, 한때 여섯 살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어느새 열두 살이 된 아이의 성장, 그런 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그렇게 아이들 생각을 많이 하며 시를 읽다가... 내가 아이들을 키웠던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모습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신시가지 아파트의 모습이 문득 겹쳐 보였다. 그러자 내가 여섯 살 때, 꽃그늘 아래서 나를 기다려줬던 사람이 선연히 떠올랐다. '엄마'라는 자아에 가려 깊이 숨어있던 '딸'의 자아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내가 '엄마'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우리 엄마의 대표 이미지는 30대의 엄마이다. 여섯 살 때 나는 막 개원한 지 1년밖에 되지 않는 집 근처의 새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유치원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다른 유치원이 들어섰다고 하니 세월을 짐작할 만 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유치원을 다녔던 게 어느새 30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도 가끔 그때의 일상이 바로 몇 년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유치원 하원길에 교문 앞에 나오면... 30대의 꽃 같이 예쁜 우리 엄마가 유치원이 끝나고 나온 나를 보며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늘 거기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늘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었으며, 한 번도 부재를 의심한 적 없는, 그 나무 그늘 아래 있어줬던 엄마. 어떤 유명인들은 특정 나이, 특정 모습으로 우리에게 대표 이미지가 각인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에겐 우리 엄마의 대표 이미지라고 하면 어린 나를 키우던 30대의 그 이미지다. 매일 유치원 하굣길마다 나를 데리러 오던 그 얼굴. 공개 수업 날 엄마가 왔을까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면 많은 무리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던 그 얼굴. 유치원이나 학교 바자회 날이면 봉사자들 틈바구니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고 반가워할 수 있었던 그 얼굴이 나에겐 우리 엄마의 대표 이미지이다.


'엄마'라고 하면 그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확실히 못 박혀 있어서인지 내게 익숙한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어느새 손주 다섯의 할머니가 된 우리 엄마를 보면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런데 변한 건 엄마의 모습만이 아니다. 유치원에서 종종걸음으로 엄마를 찾아 나오던 여섯 살 꼬마 아이가 어느새 30대 후반의 엄마가 되었다.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나는 그 엄마. 그 엄마는 여전히 오후 3시 30분에 여섯 살 아들을 데리러 유치원으로 간다. 엄마가 늙은 만큼 나는 자라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 보고 있다.


내 머릿속에 확실히 못 박힌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궁금해진다. 내가 30년째 같은 이미지를 엄마로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어떤 모습 어떤 장면을 엄마의 대표 이미지로 기억하게 될까. 가능하다면 여유롭고 쾌활한 웃음을 짓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혹은 다정하고 포근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목 늘어난 티셔츠 입고 소리치는 모습은 아니기를. 우리 엄마처럼 곱고 예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았으면 한다.


.... 엄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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