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받은 즐거운 편지

by 주정현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필사 모임을 2년에 걸쳐 꾸준히 하다 보니 예전에 필사했던 시를 다시 받을 때가 있다. 모임 멤버가 그대로 쭉 가는 듯하면서도 계속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신규 멤버는 자신이 합류하기 이전에 어떤 시가 오갔는지 알 수 없다. 겹치면 겹치는 대로 보내주시는 시를 감사히 받아 멤버들과 다시 나눈다. 오늘의 시,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도 작년 11월에 필사했던 시였지만 반년만에 다시 같은 시를 나누게 되었다.


시는 참 이상하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시는 토씨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내가 변했기 때문일까. 내가 변한 게 아니라면 그 사이에 세상이 변했을까. 가을에 읽었던 <즐거운 편지>와 그동안에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난 이후에 만난 <즐거운 편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물론 여전한 감상도 있었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하며 1연의 '그대'라는 단어를 읽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그대는 단 한 사람이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하며 2연의 '그대'라는 단어를 읽어도 여전히 그 사람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가을에도, 봄에도 늘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하나였고 스무 살 그 겨울부터 나는 쭉 그래 왔다.


작년 가을에 이 시를 필사할 즈음 남편이랑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연애 첫 해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15년 전 가을. 그해 연말에 내가 '우리 이만 헤어져.'라는 노랫가사같은 말을 그에게 던졌다고, 그때 자신이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 줄 아느냐고 그가 타박(?)했다. 뭐?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내 머릿속에는 전혀 남아있지 않은 기억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전혀 진지한 마음에서 했던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아마 스무 살 철없는 마음에 나왔던 어떤 투정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 시절의 나는 어땠던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이전에 최장 연애기간은 고작 3개월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만나 처음으로 누군가와 1년 가까이 연애를 했다. 사귄 지 1년쯤 되었을 때, 이 사랑의 어디쯤엔 '끝'이 있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더 당연하게 느껴졌다. 스무 살. 누군가를 쉽게 만나고 누군가와 쉽게 헤어지고 쉽게 마음을 주고 쉽게 마음을 접는 그런 나이. 고작 만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우리는 어떤 사소한 계기로도 헤어져 남이 될 수 있는 연인 사이였고 그만큼 위태로웠던 시기였다. 어쩌다 투정처럼 건넨 헤어지자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런데 어느새 우리는 열여섯 번의 가을을 함께 보냈고, 열일곱 번째 봄을 함께 보내고 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내 옆자리를 지킨 남편은 내 인생의 배경처럼 당연한 존재가 되었다.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사소해진 마음이 부부 사이 아닐까. 만약 그때 우리가 진짜로 헤어져서 '구남친, 구여친'의 관계가 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나는 그를 떠올리며 펑펑 울었을까? 영화의 감성을 빌려도, 구슬픈 이별 노래를 들어도 남편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 내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시간 동안에 우리는 늘 함께하겠지. 그리고 내가 그를 생각하는 건 항상 그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당연하게 곁을 지키는 사람이 오늘 영국으로 출장을 간다. 지금쯤 그는 공항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잘 다녀오라고, 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겠다*고 황동규 시인의 시를 보내볼까. 그가 곁에 있는 것이 당연했던 사소한 일상에 아주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 날, <즐거운 편지>를 다시 받으니 마음이 삼삼하다. 시를 읽으며, 그리고 그의 부재를 느끼며, 자칫하면 너무 일상적이라 사소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이 마음을 오늘 다시 한번 또렷하게 되새겨본다.



* 모임 멤버 중 한 분이 이 시의 주제가 '적극적 기다림의 자세'라고 참고서에 명시되어 있다고 제보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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