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7분,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잠결에 메시지를 보고 순간 머리가 멍했다. 뭐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길래 멀리 있는 친구가 새벽부터 나의 안부를 걱정하는 걸까? 그런데 왜 내가 한국에 들어온다고 생각한 거지? 결국 염려하던 일이 벌어진 걸까?
뉴스 포털에 접속하자 '<속보> 러 지상군, 우크라이나 진입'이라는 헤드라인이 보였다. 이거였구나.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근래 들어 연일 보도되는 뉴스에 불안감은 한층 높아지고 코 앞에 닥친 전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아침, 아직은 옆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전쟁이 실감 나지 않았다. 전쟁 뉴스도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먼저 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친구에게 폴란드는 (아마도) 안전하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 뒤로 몇 건의 안부 메시지를 더 받았다. 뉴스를 접하자마자 폴란드에 살고 있는 내 생각이 났다면서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결국 전쟁이 났대."
아침 인사 대신 남편에게 건넨 첫마디는 어쩔 수 없이 이랬다. 남편은 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하고 평소와 같이 출근했다. 현재 남편의 사무실에는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 주재원 분들이 와 계신다. 지난 11일, 한국 정부에서 우크라이나 여행금지령을 발표했을 때 가까운 폴란드로 오셨고, 남편은 우크라이나 주재원분들을 마중하러 바르샤바 공항에 나갔다가 한국 공중파 뉴스에 슬쩍 얼굴을 비추기도 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우리가 이렇게 멀리 살고 있는데 한국 뉴스에 나온다니 참 별일이다,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설마 전쟁이 나겠어? 21세기에?'라는 안일한 마음이 더 컸다.
아이들 방학이라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잠깐 커피도 마시고 친구도 만날 겸 막내와 함께 집 앞 카페에 갔다. 이날은 뚱뚱한 목요일(Tłusty czwartek), 사순절을 앞두고 달고 기름진 도넛을 먹는 폴란드의 전통 명절이다. 집 근처 유명한 도넛 가게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친구를 만난 카페도 도넛이 맛있기로 유명한 집이라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가게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더없이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 속에서 전쟁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테이블은 왠지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은 옆 나라 전쟁보다 도넛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
날씨는 포근했고, 햇볕은 눈부셨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전쟁이 나긴 난 모양이야."
해가 지고 바깥이 어두워진 퇴근 시간, 외투 깃을 여미며 현관을 들어서는 남편이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순간 기분이 서늘해졌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차에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에 들렀는데 하도 줄이 길어서 결국 주유를 못했단다.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첫 번째 주유소에서도, 두 번째 주유소에서도 허탕을 쳤다. 조금 멀리 돌아가서라도 또 다른 주유소를 들를까 하다가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 같아 일단 시간이 늦어서 집으로 왔다고, 내일은 사정이 좀 나아져야 기름을 넣고 출근할 수 있을 텐데 하며 남편이 걱정했다. 당장 기름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내 차엔 기름이 얼마나 남았더라? 다음 주에 애들 등교하는 덴 문제없겠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뉴스를 보니 하루 만에 폴란드 즈워티 환율이 급락했다.
2월 25일 금요일
새벽에 잠을 설쳤다. 골목길에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울분을 못 이기고 소리치는 아저씨, 무언가 울먹이며 호소하는 아줌마. 서너 명의 사람들이 서로 다투듯, 호소하든, 싸우듯 소리쳤다. 그 아우성 소리는 건너편 셰어하우스에 사는 우크라이나인 노동자들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건설현장에서 입는 조끼 같은 것을 입고, 새벽마다 9인승 밴을 타고 다 같이 출근하는 사람들인데, 열에 아홉은 우리 집 앞에 밴을 주차해놓기 때문에 가끔씩 그들이 출근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곤 했다. 새벽에 남의 집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우다니. 평소 같으면 눈을 흘기며 그들을 원망했겠지만 오늘 새벽에는 그냥 2층 창문으로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저들은 지금 어떤 심정일까.
남편은 주유소에 들러야 한다며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이날도 아이들은 방학이었고 이번 주말은 바르샤바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근교 호텔에서 보낼 예정이었다. 원래 남편이 휴가를 냈던 지난 주말에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막상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강풍으로 호텔 전체가 정전이라 어쩔 수 없이 숙박 일정을 한 주 미뤘다. 퇴근하는 대로 바로 짐을 챙겨 호텔로 가려다가 도착하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것 같아 저녁을 집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고 가기로 했다. 식당에 들어가려는데 불이 꺼져있다. 어? 오늘 영업 안 하시나요?
아니라고, 영업한다고, 들어오라고 사장님이 손짓하시는데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어두운 식당 안. 사장님은 다시 전등을 켜고 머뭇머뭇하시다가,
"전쟁이 나고, 손님도 별로 없길래, 그냥 일찍 문 닫고 가려고 했는데..."
라고 말하며 직원 아주머니를 먼저 퇴근시키고 직접 서빙을 해주신다. 아주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까닥 숙이고는 가게 문을 나선다.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딸 둘이 오늘 폴란드로 피난을 오는 중인데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단다. 하루 종일 아이들 걱정에, 어제부터 아주머니는 한숨도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국경 앞에 장사진을 이룬 피난민들, 국경지역에서 그들을 안전한 도시로 이동시켜주는 중개인들. 내 나이만큼 오랜 시간 동안 폴란드에 사셨던 한국인 사장님이 그간 이 나라에서 겪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처음이야, 처음이야, 하시면서.
식사를 마친 후 호텔로 이동하는데 남편의 전화기가 계속 울려댄다. 호텔에 도착해서도 남편은 울려대는 전화에 응답하느라 정신이 없다. 다국적 기업인 남편 회사는 우크라이나에도 법인이 있고, 그곳에 근무하는 현지 직원들이 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폴란드로 피난을 오기 시작했다.
2월 26일 토요일
자고 일어나면 뉴스부터 확인해보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뉴스보다 더 생생한 소식을 바로 옆에서 듣고 있긴 하지만. 주말이고 여행을 왔지만 남편의 정신은 저기 국경지역 어딘가로 반쯤 날아가 있었다. 그러려니 하면서 나는 아이들을 돌봤다. 저 멀리서 아이들을 돌보며 국경을 넘는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우크라이나-폴란드 간 국경은 피난 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는지라 차량으로 이동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차를 두고 걸어서 국경을 건너야 했다. 징집령이 내린 아빠는 본국에 있어야 했고, 엄마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국경을 넘고 있었다. 폴란드나 기타 다른 지역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진즉에 국경을 넘어 피신을 왔고, 토요일인 오늘에야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은 정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엄마가 회사 직원인 사람도 있었고, 배우자가 회사 직원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누군가가 이 땅 너머에서 어떻게든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줄 거라는 막연한 희망만을 가지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었다.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들어오면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들에겐 안전하고 따뜻한 거처가 필요했다. 폴란드로 피난을 오는 직원 가족이 한 자릿수였을 때에는 그나마 금요일에 확보해 둔 숙소로 충분했는데, 두 자리 수가 넘어가자 상황이 더 어려워졌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바쁜 남편을 호텔에 두고 아이들과 함께 호숫가로 산책을 나왔다.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곧 날이 어두워지는데, 날씨는 영하로 내려가 추워지는데... 아직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며 "아직도 국경을 못 넘었대?" 하고 물어보니 남편이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어둑해진 도로 위에 사람들이 길게,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언제 이곳을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국경 근처에서 무사히 그들을 만났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를 바랐지만, 끝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2월 27일 일요일
"무사히 넘었대?"
요즘 아침인사는 이런 식으로 두서가 없다. 다행히 "새벽 2시에 넘었대." 하는 소식을 전해주며 남편이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큰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꼬마 아이 한 명과 비슷해 보이는 나이의 소년 한 명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국경을 걸어서 넘느라 아이들은 스키복을 입고 있었는데, 마치 스키리조트 한복판에서 만나도 이상할 것 하나 없을, 그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니 왈칵 울음이 나왔다. 밤새 16킬로미터를 걸어서 국경을 넘어왔다고 했다. 만약 나였다면... 남편 없이 나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그 험난한 여정을 걸어올 수 있을까? 엄청 무섭고, 춥고, 다리도 아팠을 텐데... 그렇게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더 슬펐다.
그런데 여전히 숙소가 문제였다. 그간 피난 온 가족들도 꽤 많은 숫자였는데, 앞으로 또 계속해서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올 예정이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 지, 그리고 또 얼마나 장기 체류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일주일 새에 약 20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왔다고 한다. 남편 회사 직원들만 해도 그 수가 상당했다. 남편은 월요일에 현지 직원들을 대상으로 홈스테이가 가능한 집을 추려볼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 집에서도 홈스테이를 제공한다면 어떨까? 특히 우리 집에는 마당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도 많은 편이니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가 머문다면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조심스러운 나의 제안에 남편은 괜찮겠냐고, 현실적으로 그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닐 거라고 답했다. 전쟁이 언제 끝날 지, 체류가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르는 낯선 사람을 식구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나 혼자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아이들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머뭇거렸다. 특히 낯을 많이 가리고 수줍음이 많은 막내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안색이 새파래졌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해? 하고 둘째가 물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꼭 그래야 할 의무는 없어. 이거는 선택할 수 있는 문제야. 그래서 너희의 의견도 존중하고 싶어서 물어보는 거야. 그렇지만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는 만약에 엄마가 비슷한 상황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거든. 우리나라에 전쟁이 났고, 아빠는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해서 한국에 남아 있어야 하고, 엄마 혼자서 너희들을 데리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웃 나라로 피난을 왔는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모든 것이 막막할 때 누군가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방 한 칸을 주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다행히 우리 집에는, 조금 정리가 필요하겠지만 손님 한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여분의 방이 있고, 화장실이 있으니까 도와줄 여력이 있어. 우리에게 여유가 되는 부분이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고맙고 보람된 일이니까.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일 거야. 사실 엄마도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살아본 적이 별로 없어서 상상하지도 못한 정말 많은 어려운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해. 예전처럼 집이 편하지 않고 많이 불편할지도 몰라. 우리랑 언어도 다르고, 먹는 것에서부터 여러 문화가 다른 사람을 식구로 맞아들이는 일이야. 그리고 지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 그들의 힘든 감정에 우리가 되려 많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지. 엄마에게는 너희들이 첫 번 째니까 너희에게 너무 힘든 일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어. 아빠 회사에서 홈스테이 지원자를 모집할지 아직 결정 나지도 않았고. 다만 한번 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해.
2월 28일 월요일
방을 하나 비우기 시작했다. 2층에 침실로 쓸 수 있는 방이 네 개라 아이들마다 개인 방을 각자 하나씩 가질 수 있지만,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해서 두 자매의 침실을 하나로 합쳐 사용하고 있었다. 어설프게 남아있던 개인 침실의 쓰지 않는 침구를 들어내고, 이불을 새로 빨고, 낡은 책장을 옮겼다. 쓰지 않는 가구를 옮겨낸 자리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걸레질을 하고 환기를 하면서 마치 이삿날처럼 텅 빈 방을 바라보는데 기분이 묘했다.
홈스테이 문제는 아직 많은 것이 미정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일단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남편은 바르샤바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소도시에 숙소를 알아보러 갔다. 한국 뉴스와 폴란드 뉴스를 동시에 틀어놓고 왠지 뒤숭숭한 마음을 바쁜 일상 뒤로 감춰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내일은 아이들의 개학날이라 개학 준비만으로도 여러 가지로 분주했다. 학교에 가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오랜만에 가방을 꺼내 준비물을 챙기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다니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오전에는 학교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지원을 위한 전체 학부모 회의가 있었고, 저녁에는 역시 난민 지원을 위한 한국 학부모회 회의가 있었다. 거리의 버스들은 우크라이나 국기를 매달고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우크라이나 여권을 보여주면 어느 대중교통이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학교 앞 유치원에서는 우크라이나 난민 자녀는 무료로 다닐 수 있으니 혹시 원생 등록을 희망하면 알려달라고 했다. 같은 학교 학부모들 중에는 이미 여분의 집을 난민들을 위해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 측에서도 혹시 난민들을 위해 홈스테이를 제공하거든 필요한 물품이나 지원을 적극 알려달라고 공고했다. 학부모 중 누군가는 폴란드 넷플릭스에 어린이 프로그램만이라도 우크라이나어 서비스를 열어달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새로운 한 챕터를 시작하는 것 같은 월요일이었다.
저녁에는 전교생 코로나 검사 결과와 함께 무사 개학을 알리는 학교장 이메일이 왔다. 그와 별도로 디렉터 이메일이 왔는데 편지를 열어보고 생각지 못한 내용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당황스러웠다. 긴 장문의 이메일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아이들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 상황이 무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할 겁니다. 아이들이 일상의 평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세심한 관심을 보여주세요. 그러나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받을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제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고, 그중에는 우크라이나 국적의 학생과 러시아 국적의 학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입장에서는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우리 공동체의 결속과 우정에 미치는 영향만을 고려하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현재의 복잡한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되, 일상의 균형과 루틴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충분한 토론과 대화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아이의 친한 친구 중에 우크라이나 출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2년 전부터 같은 반이었고, 종종 자신의 한국어 별명을 불러주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같은 학교에 러시아 친구가 있을 거라는 건 생각을 못했지? 우크라이나 출신의 '율리나'와 러시아 출신의 '쏘냐'를 내일 학교에서 동시에 만나게 될 아이. 방학 사이에 정말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는데, 아이들은 이 새로운 일상의 국면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큰 아이와 저녁 식사 후에 잠시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 나라의 국민과 그 나라의 정치적 행동은 별개라는 이야기로 화두를 열었는데 러시아 내에서 반전 시위를 하다가 잡혀간 사람들의 이야기와 국민의 대다수의 의견과 국가 지도자의 의견은 상반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섞어하다 보니 전날 다녀왔던 재외국민 투표 이야기까지 연결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친구는 이 국제학교에 꽤 오래 재학 중이었지만, 러시아 출신의 친구는 이번 학기에 새로 전학 온 친구이기 때문에 서로의 친밀도에 따라 이상한 편 가르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국제학교의 특수한 상황과 일어날 수 있는 불필요한 갈등에 대해 학교 선생님들과 구성원들이 인지하고 있으니, 혹시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논의해서 잘 해결해나가리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했다.
개학 전날, 가방을 챙기는 마음이 씁쓸했다.
"엄마, 대체 전쟁은 왜 하는 거야?"
어느 식사시간엔가 둘째가 물었다. 엄마의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아이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대체 전쟁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 다 같이 평화롭게 살면 좋잖아. 그러면 아무도 다치지도 않고, 아무도 도망치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되잖아. 자기 나라가 힘이 세다고 다른 나라를 괴롭히는 건 이상해. 전쟁 따위는 없어졌으면 좋겠어."
이 답답한 상황 속에서 우울해하는 엄마 얼굴을 바라보며, 아이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이렇게 대답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