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필사하고 있는데 동생과 싸우고 마음이 토라진 둘째가 무릎 위로 올라와 폭 하고 안긴다. 서운한 마음을 엄마 품에서 다 풀고 갈 요량인지 절대 내려오지 않는다.
"엄마 시 쓰고 있었는데 같이 써볼까?"
아이와 손을 모아 잡고 함께 시를 필사했다.
시를 읽어달라 해서 시를 옮겨적으며 소리 내어 낭독도 해 본다.
'사나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봐서 어른 남자를 이야기한다고, 이 시를 쓴 윤동주라는 시인이 남자라서 우물에 비친 자신을 보고 사나이라고 부르는 거라고 알려주었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럼 그 '사나이'가 왜 밉냐고 물어본다.
우물을 들여다보면 누가 보일까? 자신이 보이겠지? 우물은 거울처럼 내 얼굴을 비추니까. 너는 거울 속에 비친 네가 미워 보인 적이 없니?
아이는 엄마의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는 그런 적 없는데?"하고 답한다. 순수하게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일곱 살 어린이의 쩌는(?) 자기애가 괜스레 부러워진다.
사나이가 떠난 우물에는 더 이상 사나이가 없기에, 그곳에는 가을 풍경만 남은 거라고 해설을 곁들이며 마지막 연을 읽어줬다. 아이는 가을이니까 우물 위에 단풍잎 한 조각이 떠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사나이가 떠난 자리에 혼자 남아있을 우물이 외롭지 않도록 말이다. 예쁘고 순수한 어린이의 눈으로 시를 함께 읽을 수 있어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함께 필사 모임을 하는 분이 영화 <동주>의 강하늘 배우 낭독 버전으로 시를 보내주셨다.)
덧 1. 아이는 "이렇게 시를 옮겨적으니 마치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라고 이야기했다. 올해 들어 엄마가 매일 시 한 편씩을 옮겨 적는 것을 보고 아이의 아흔아홉 가지 장래희망 중 대충 마흔여덟 번째 장래희망으로 '시인'이 추가되었다. 언젠가 아이는 자신이 시인이 돼서 시를 쓰면 그걸 필사해달라고 했다. 그럼, 해줄게. 얼마든지 해주고 말고. 오늘은 둘째가 시인이 된 아침이었다.
덧 2. 아이의 고사리손을 잡고 함께 시를 쓰니 평소와 다르게 글씨를 흘려 쓰지 않고 또박또박 바른 획순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원래 나는 ㄹ이나 ㅂ같은 것들을 획순을 지키지 않고 휘리릭 제멋대로 쓰는데(사실 성인들 중에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바른 획순'을 일일이 다 지켜가며 글씨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에 비해 맨날 아이들에게는 획순 지켜서 쓰라고 잔소리를 하곤 한다. 엄마의 이중성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평소보다 조심조심 글씨를 쓰게 되었다. 아이가 내 거울이자 우물이며 자화상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