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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16. 2022

방앗간이 없어도 추석에는 송편


 추석을 앞두고 유튜브에서 '송편 만드는 법'을 검색해 봤다. 송편 반죽의 기본은 멥쌀가루에 익반죽을 하는 것. 명절날 어느 가정에서나, 어른들도 아이들도 다 같이 둘러앉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떡이 바로 송편이니 레시피 자체는 다른 떡에 비해 크게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해외에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인터넷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이 송편 레시피가 그리 간단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송편 레시피가 '습식 쌀가루'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쌀가루는 크게 습식과 건식으로 나뉜다. 우리가 마트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쌀가루는 모두 건식 쌀가루다. 폴란드 마트에서도 어느 곳에서나 쌀가루를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여기는 대부분 제빵용이긴 하다)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이 밀봉된 제품은 전부다 건식 쌀가루다. 습식 쌀가루는 쌀을 물에 불린 다음에 갈아 만드는 것으로 습도가 높아 냉동보관을 하지 않으면 금방 상하기 때문에 일반 마트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습식 쌀가루는 1. 집에서 직접 쌀을 불려 맷돌 기능이 있는 고성능 믹서기에 갈아 만들거나 2. 방앗간에 불린 쌀을 가지고 가서 갈아달라고 해야 한다.  


폴란드 마트에서 파는 쌀가루(maka ryzowa). 어느 쌀가루가 네가 원하는 쌀가루냐고 묻는다면 셋 다 아니올시다...


 우리 집에는 쌀가루를 만들 수 있는 고성능의 믹서기가 없다. (늘 구매욕구는 충만하지만 이미 주방가전이 넘쳐나서 마음을 매번 고쳐먹곤 한다.) 그리고 폴란드에는 방앗간이... 없다. 즉 습식 쌀가루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습식 쌀가루를 주재료로 하는 송편 만들기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불린 쌀을 들고 방앗간에 가서 "송편 만들 거니까 소금 좀 더해서 갈아주세요."라고 하면 손쉽고 간단하게 송편 반죽의 밑재료를 완성할 수 있었을 텐데, 방앗간이 없어서 건식 쌀가루를 사용해야 하니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그러고 보면 방앗간은 한국에만 있는 시설이다. (몇 년 전 엘에이에 살 때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김방아' 앞을 늘 지나가곤 했지만 엘에이는 미국이 아니라 제2의 한국이라 부를 만하니 예외로 두자.) 떡을 해 먹지 않는 문화권이라 할 지라도 세계 어느 나라 요리에서나 가루로 된 식재료는 광범위하게 사용될 텐데 왜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방앗간을 찾아보기 힘들까. 굳이 떡에 필요한 쌀가루뿐만 아니라 방앗간에서는 참깨와 들깨로 고소한 기름도 짤 수 있고, 콩가루, 미숫가루, 고춧가루, 들깻가루 등 우리 요리에 쓰이는 곱고 고운 가루들을 만들 수 있는데. 혹시 폴란드에도 방앗간, 혹은 제분소가 있을까 하여 구글 지도에서 찾아봤으나 중세시대 유적지로 남아 있는 관광용 물레방앗간(młyn wodny) 혹은 크라쿠프에 있는 '방앗간 헬스장'(młyn fitness; 지방을 분쇄해서 가루를 내주는 곳인가 보다... )만 찾아볼 수 있었다. 현대 유럽에서는 한국과 같은 동네 방앗간을 찾아볼 수 없다.


 중세 유럽에서 방앗간은 개인의 상점이 아닌 영주의 직속 시설이었다고 한다. 통으로 된 알곡에 물만 넣어 요리하면 되는 쌀, 혹은 밥을 주식으로 삼는 우리와 달리, 빵이 주식인 유럽 사람들에게 통밀을 밀가루로 만들어주는 방앗간은 마을의 필수 시설이었다. 밀은 쌀과 다르게 농사를 짓기만 해서는 음식으로 섭취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빵을 주식으로 삼는 유럽인들에게 가루를 빻는 것도, 빵으로 구워내는 것도 모두 먹고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일개 가정집에서는 하기 힘든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서민들은 모두 방앗간을 필수적으로 이용해야 했고,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봉토 내의 방앗간을 이용해 사람들을 통제했다고 한다. 영지 내의 모든 영민들은 의무적으로 방앗간에 이용료를 내고 곡물을 빻아야 했으며, 이 이용료는 고스란히 영주의 수입이 되었다.


 공영 시설이었던 방앗간은 농업 국가에서 산업 국가로 탈바꿈하는 근대기에 들어서면서 더 이상 민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설이 되었다. 애초부터 민간으로 운영되던 시설이 아니었으니 마을에 있던 방앗간은 모두 공장 시설에 흡수되었고, 우리는 이제 손쉽게 마트에서 밀가루를 산다. 일반 밀가루, 통밀가루,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글루텐프리, 곱게 간 것, 거칠게 간 것, 통밀과 반반 섞은 것 등등... 밀가루 코너에 가면 밀가루의 종류는 차고 넘쳐난다. 스무 가지가 넘는 다양한 종류의 밀가루를 어렵지 않게 마트에서 만날 수 있으니 동네에 방앗간이 필요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한국인인 나는, 쌀 문화권에서 온 나는, 명절에는 떡을 먹어야 하는 나는, 방앗간이 너무나 절실하다. 폴란드의 빵집만큼 많은 게 바로 우리네 떡집일 텐데. 폴란드 한복판에서 애타게 방앗간을 그리워하며 동네 골목 어귀에 있던 쌀방앗간의 풍경을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그림책 <할머니네 방앗간(글, 그림 리틀림; 고래뱃속 출판)>에는 내가 그리워하는 한국의 방앗간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인절미, 약밥, 백설기에 무지개떡까지, 내가 좋아하는 떡이 가득한 진열대 뒤로 그리운 방앗간의 풍경이 담겨 있다. 한국에 살 때는 집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떡집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 재래시장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방앗간은 편의점만큼이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장소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빨간 대야 속에는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습식 쌀가루'가 소복이 담겨 있고, 그 옆에는 언젠가 참기름과 들기름이 고소하게 담길 초록색 기름병이 보인다. 표지를 넘기면 면지에는 털털털털, 소리를 내며 바쁘게 돌아가는 방앗간 기계 그림이 담겨있는데, 기계 소리뿐만 아니라 그 흥겨운 분위기와 고소한 냄새가 종이를 뚫고 나올 것만 같다.



 방앗간은 사시사철 바쁘다. 봄에는 쑥을 가득 담아다가 고운 쑥떡을 만들어야 한다. 친정엄마는 해마다 봄철이면 쑥 인절미를 한가득 맞춰다가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두고 아침마다 꺼내서 프라이팬에 살짝 구워주셨다. 빵처럼 쉽게 물리지도 않고, 밥처럼 차리기 번거롭지도 않은 이 쑥 인절미 구이는 한동안 우리 집의 고정적인 아침 메뉴였다. 새 학기가 시작할 때쯤엔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이웃들이 시루떡을 돌린다. 커다란 이삿짐 트럭이 우리 집 공동현관을 막아서는 날에는 누군가가 띵똥, 초인종을 누르며 따끈따끈한 시루떡을 건네주곤 했다. 여름 끝무렵에는 빨간 고추를 말리는 소쿠리가 방앗간 앞에 주르륵 늘어서 있어서 오다가다 코를 찌르는 매콤한 냄새를 맡기도 했고, 추석이나 설날 같은 큰 명절을 앞둔 휴일에는 산처럼 쌓인 송편과 떡국떡이 떡 진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방앗간의 풍경은 늘 그 자리에서 똑같은 듯 반복되면서도 계절에 따라, 풍습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며 우리의 추억을 자극한다.


방앗간의 사계절 풍경. 출처 <할머니네 방앗간(글, 그림 리틀림; 고래뱃속 출판)>


 우리 아이들은 이 풍경을 알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 살 때도 늘 떡집 앞을 어슬렁거리기는 했지만 정말 쌀이나 콩을 가지고 직접 갈아달라고 방문한 적은 별로 없었다. 사실 한국에 있었다면 직접 송편을 빚어 먹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추석날 가정에서 송편을 직접 빚기보다는 떡집에서 사 먹는 게 양도 많고 맛도 좋고 더 저렴하니까.  


 애타게 찾던 습식 쌀가루는 결국 포기하고 아쉬운 대로 건식 쌀가루로 송편을 만들기로 했다. 대신 멥쌀가루만 쓰는 기존의 송편 레시피를 조금 변형해서 멥쌀가루와 찹쌀가루를 3대 1의 비율로 섞어 익반죽을 해야 했는데, 이때 사용하는 쌀가루는 꼭 한국에서 공수해온 한국산 쌀가루여야 했다. 유럽 마트에서 파는 일반 쌀가루는 한국의 쌀 품종과 다른 바스마티 쌀로 만든 쌀가루가 대부분인지라 멥쌀가루 중에서도 더더욱 찰기가 없어 떡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 재작년 추석에 시중 마트에서 파는 멥쌀가루로만 송편 반죽을 만들어보겠다고 도전했다가 아무도 먹지 못하는 딱딱한 돌떡을 만들게 되었던 뼈아픈 기억이 있다. 올해는 찹쌀가루도 멥쌀가루도 모두 한국에서 어머니가 보내주신 '물 건너온 외제품'을 사용한 지라 그나마 고국의 맛을 재현할 수 있었다.  


 어느새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맞이하는 네 번째 추석이다. 보통 4년 임기로 해외파견을 나가는 주재원 신분이기 때문에 어쩌면 내년 추석은 폴란드가 아닌 한국에서 보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년 가을을 한국에서 보내게 된다면 그때는 꼭 직접 방앗간에 가서 쌀을 갈아달라고 부탁해봐야지. "송편 만들 거니까 소금 좀 더해서 갈아주세요."라고, 송편 꽤나 만들어본 야무진 새댁처럼 이야기해보고 싶다. 아, 그러고 보니 요즘은 호떡믹스나 식빵 믹스뿐만 아니라 송편 믹스도 나온다던데. 온라인마트 택배 트럭이 새벽에 떡을 배달하고, 대형마트 진열대에 송편 만들기 키트가 등장하다 보면 언젠가 한국에서도 동네 방앗간을 찾아보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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