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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08. 2022

눈호랑이 팥 범벅


 어제저녁, 커다란 냄비 한가득 팥을 삶았다. 푹 삶아진 팥을 갈아 설탕을 조금만 넣고 살짝 묽게 끓여서 단팥죽으로도 한 그릇 먹고, 조금 더 수분이 날아갈 때까지 끓이다가 더 달큼하게 설탕을 넣어 꾸덕한 팥앙금도 만들었다. 부드러운 바게트 빵을 사다가 도톰하게 버터를 발라 앙금을 얹어 먹으면 앙버터 빵이 되고, 우유와 섞어서 길쭉한 아이스크림 틀에 넣으면 팥 아이스크림도 만들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팥앙금을 제일 맛있게 먹으려면 팥빙수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 특별히 공수해온 빙수기계를 찬장에서 꺼냈다.


 시원한 팥빙수는 물론 한여름에 먹어야 제맛이겠지만, 정말 더운 여름날에는 팥빙수를 해 먹기 힘들다. 한국처럼 여름철 모든 카페와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사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여기는 여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팔지 않는 유럽이 아니던가. 먹고 싶은 모든 것은 다 맨 처음부터 모든 재료를 직접 손질해서 내가 내 손으로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팥을 삶고 으깨고 졸여서 팥앙금을 만드는 일은 한여름에는 너무나도 고된 중노동이다. 가뜩이나 삼시세끼 밥을 차리느라 주방에 서 있으면, 뜨끈한 열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여름의 고된 일상인데, 거기에다가 팥앙금을 만드는 일까지 추가해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너무 괴롭다.


 그러니 오히려 팥빙수를 직접 만들어먹기에 적절한 날씨는 딱 요즘 같은 날씨다. 저녁 무렵 선선한 바람이 불 때 부엌에서 보글보글 팥앙금을 만들어놨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식혀둔다. 아침엔 패딩을 입고 등교하고, 오후엔 반팔 차림으로 하교하는 아이들은 한낮에는 시원하고 달달한 간식을 찾기 마련인데, 이럴 때 팥빙수만큼 인기 있는 간식이 없다.  


 오늘 아침의 최저기온은 영상 9도. 9월이 되기 무섭게 폴란드는 급격히 쌀쌀해졌다. 한낮의 햇볕은 아직 여름만큼 뜨거워서 선글라스 없이는 눈이 시릴 정도로 따가운데, 아침저녁으로 얼굴에 닿는 공기는 소름이 소소소 돋아날 정도로 서늘하다.


 이지은 작가의 그림책, <팥빙수의 전설>에 등장하는 눈호랑이를 만날 것 같은 날씨다. 눈호랑이는 딱 요즘 같은 날씨에 '어흥'하고 나타날 것만 같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그런 날', 참외와 수박과 딸기와 토실토실하게 영근 팥알을 수확해서 할머니가 장에 가는 날. 추석을 앞둔 늦여름과 초가을의 어느 서늘한 날이면 딱 그런 눈호랑이를 마주칠 것만 같다. 실제로 4월과 5월에도 가끔 눈이 오는 폴란드는 '요렇게 따스운 날에 눈이 오는' 이상한 기후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봄날의 추위와 엇비슷한 9월 하늘에 눈이 내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오메오메. 그래도 설마 9월부터 눈이 오겠냐마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있으니.


 해가 있고 없고에 따라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다 보니 매일 아침마다 아이들 옷을 어떻게 입혀 보내야 하나 고민스럽다. 현지 아이들은 이맘때쯤 어떻게 옷을 입나 궁금해서 엊그제 등굣길에 다른 아이들 옷을 유심히 살폈더니, 이미 아이들 중 삼분의 일 이상은 경량 패딩을 입었다. 5월이 되어서야 겨우 패딩을 벗었는데 9월 초부터 다시 꺼내 입어야 한다니... 앞으로 패딩을 지겹도록 입을 날이 하염없이 남아 있다는 걸 알기에 어떻게든 9월만큼은 가벼운 옷차림을 고집하고 싶었지만, 이런 간절기일수록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옷을 따뜻하게 입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넉 달만에 다시 옷장에서 패딩점퍼를 꺼냈다.


 벌써 패딩을 몸에 두르니, 왠지 마음이 금세 겨울이 된 것 같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을이 훅 가버리고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릴 것만 같다. 지금은 팥빙수를 만들겠다고 팥앙금을 만들고 있지만, 몇 달 뒤면 동지 팥죽을 만들겠다고 비슷한 일을 (사실은 거의 똑같은 과정을) 부엌에서 반복하고 있을 것 같다. 아마 동짓날에도 오늘처럼 일부는 덜어서 팥죽으로 먹고, 나머지는 달콤하게 빙수를 만들어먹겠지. 그때엔 정말 눈호랑이 솜털처럼 새하얀 눈이 하늘에서 내릴지도 모르겠다.


원래 팥빙수도 냉면도 겨울음식이라던데, 어쩌다보니 선조들의 전통을 더 살뜰히 지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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