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역할 훈련>에서 만난 문장
아이들은 부모의 태도와 감정을 놀라울 정도로 예민하게 포착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비언어적' 메시지를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포착하고 부모의 솔직한 감정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 사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오래되고 친밀한 관계에서 감정을 숨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 다시 말하자면 부모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다. 무조건 받아들이는 척할 필요도 없고 일관성을 지킬 필요도 없다.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는데 용인하는 척해서도 안 된다.
토머스 고든, <부모 역할 훈련>
나는 부모이기 전에 사람이다.
사람은 감정이 있다. 컨디션이라는 게 있고, 아무것도 아닌 말에 무너지는 날이 있고, 스스로를 수습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날이 있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고 해서 그 모든 감정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좋은 부모가 된다는 건, 늘 일관되고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릴 때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아이에게 보여주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나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많이 알고 있다. 올해 초, 큰아이는 임상심리전문가 선생님과 투사검사과 임상면접을 포함한 풀배터리 검사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전문가 선생님이 아이에게 KFD(동적가족화) 그림에 나타난 엄마에 대해 물었는데, 여러 이야기들 중 아이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가 갑자기 기분이 좋지 않다 싶으면 피곤하실 때, 방전됐을 때예요."
아이는 내가 피곤한 날, 억지로 웃는 얼굴 뒤에서 그 억지를 금방 알아차렸던 것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괜찮아'라고 말하는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을 아이들은 모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런 걸 느끼는 데 익숙하다.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있는 모든 걸 들키는 유일한 존재가 아이일지도 모른다. 나의 사회적 가면은 아이들 앞에서 스르륵 벗겨지고 만다.
갈등 없는 하루는 드물고, 평온한 감정만 품을 수 있는 하루도 없다. 아이도 이제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연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그냥 "엄마가 오늘은 기분이 안 좋아. 시간을 좀 줄래?"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아이가 자기감정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좋은 부모인 척, 늘 너그러운 척, 다 받아들이는 척. 그러다 보면 정작 내 마음은 진실과 점점 더 멀어지고, 아이와 나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벽이 생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아이들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예민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한다. '아냐, 괜찮아.'하고 말하면 정말 괜찮은 줄 알고 휙 돌아서던 어린아이는 이제 없다. '정말 괜찮아?'하고 되물으며 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 10대 소녀가 눈앞에 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받아들인 척하고, 억지로 괜찮은 척하면서 '엄마한테는 솔직해져도 돼.'라고 말하는 건 역설이다. 내가 먼저 솔직해져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내게 솔직해질 수 있다. 서운한 감정은 서운한 대로, 고마운 감정은 고마운 대로 솔직해져야 한다. 엄마도 사람이구나. 아이는 나를 기다려주고, 또 나는 아이를 기다려준다. 아이도 사람이니까. 감정을 다루는 일은 감정을 겪게 하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꾸 그 겪는 일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이는 자기가 감정을 소화하는 힘을 잃는다. 기다리는 법을 잃고, 물러서는 타이밍도 모른다.
예전에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늘 일관되게 대하려고 애썼다. 어제 웃었으니 오늘도 웃어야 하고, 한 아이에게 잘해줬으니 다른 아이에게도 똑같이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날마다 기분이 다르고, 어느 날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속이 뒤틀린다.
사람은 원래 그런 거 아니던가.
그걸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부모가 됐다고 해서 사람이기를 멈추는 건 아니었다. 아니, 부모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 감정이 얼마나 다양한지, 내 안에 숨겨진 부정적인 감정이 얼마나 자주 고개를 드는지를 뼈저리게 알게 됐다. 아이는 그런 내 모습을 정확하게 본다. 정확히 보고도 아무 말 안 한다. 그저 속으로 삼킬 뿐. 그건 아이에게도 부담이다.
사람은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하고, 그러고도 또다시 사랑한다. 그게 엄마인 나의 하루이고 아이와의 삶이다. 늘 참아야 하고, 늘 좋은 마음만 품어야 하고, 늘 따뜻해야 한다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 되어야 한다. 나는 신이 아니고 사람이니까,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