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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은 나를 쓰다

<모순>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보니 너무 무겁다. 풀씨가 바람에 날리듯, 마음속에서 막연히 부유하던 생각들도 정색을 하고 정리를 해보면 깜짝 놀랄 만큼 심각해지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양귀자, <모순> 21쪽


매일 아침 모닝페이지를 쓴다. 하루의 시작과 함께, 아직 세상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새벽에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다. 검열 없이 세 페이지의 노트를 채우는 게 원칙이다. 이제는 모닝페이지를 쓰지 않으면 그날 하루 마음이 찌뿌둥하고 찝찝하다. 추석 연휴에도 이 리추얼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온 가족이 늦잠을 자는 휴일 나는 일부러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췄다.


휴일인데도 새벽에 일어나려니 침대에 계속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막상 그 유혹을 이기고 자리에 앉아 펜을 들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몽롱한 정신으로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시간. 내가 가장 진실해지고 솔직해지는 시간이다.


모닝페이지에는 언제나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포기했던 길들.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없는 길들에 대한 이야기.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그리움처럼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면 깨닫는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에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사실은 일하고 싶어. 그 마음이 사라지질 않아."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 마냥 눈물이 그냥 저절로 주르륵 흐른다. 나는 그저 울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살림을 하고, 틈틈이 프리랜서로 일하며 살고 있는 지금의 일상에 대체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몸은, 감정은, 머릿속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해외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한때 내가 추구하던 전문성의 길은 점점 멀어지기만 했다. 경력단절이라는 말이 이제 익숙해졌을 무렵, 파트타임으로, 프리랜서로 다시 일하기 시작하며 하나씩 포트폴리오가 쌓이자 다시 길을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니 다시 의구심이 생겼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이었을까? 나는 지금에 스스로 만족하나? 혹시 '이 정도면 괜찮다'며 스스로를 설득해 온 건 아닐까? 사실은 정규직, 전문직, 이름이 있는 일, 소속이 있는 일. 그런 삶을 여전히 간절히 원하면서도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고 스스로에게 체념을 강요해 온 건 아닐까?


솔직해져 보자. 과거의 갈망이 이제는 사라졌는가?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음 한가운데엔 커다란 구멍이 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나만은 그 빈자리를 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도, 작은 일상의 성취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망함. 세상 사람들이 다 괜찮다고 해도, 내가 괜찮지 않으면 결국 괜찮지 않은 거다. 이토록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모닝페이지는 그런 진실을, 내밀한 속마음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평소엔 바람결에 흩어지듯 부유하던 생각들이 새벽의 정적 속에서 펜촉 아래로 모인다. 어제까지는 별일 아닌 줄 알았는데, 글로 옮기고 나면 그게 내 안의 가장 깊은 상처였음을 알게 된다.


오늘의 모닝페이지를 마치며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렇게까지 무거운 마음이었구나.' 그걸 인식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모닝페이지는 내 안의 진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그 진심을 견딜 수 있게 도와준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펜을 움직이며 - 어쩌면 괜찮지 않은 나를 괜찮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이 조용한 새벽의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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