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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Aug 22. 2020

필생의 사랑

스물한 살에 들었던 '연애학 강의'를 추억하며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속 한 문장이 내게 말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남편을 처음으로 '필생의 사랑'이라고 불렀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내가 스무 살에서 스물한 살로 넘어가던 그 시절의 이야기다.




 갓 성인이 되었던 미숙한 스무 살의 나이. 성인이지만 어른이라고는 할 수 없었던 풋풋했던 나이. 그리고 사랑에도 많이 서툴렀던 나이.

 대학에서의 첫 1년을 보내고 난 이후, 나에겐 연애소설을 몇 편이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쌓여있었다. 물론 실속은 없었다. 서툴렀고, 마음을 숨겨야 할지 드러내야 할지 갈팡질팡했으며, 좋아하는 마음을 세련되게 드러낼 만한 기술도 연륜도 없었다. 짝사랑도 했었고, 썸도 무수히 탔었고, 남자 친구라고 공식적으로 부를만한 사람도 있었지만 짧게 사귀다 헤어졌다. 그러다가 어느새 해가 바뀌고 스물한 살이 되었다.


 1월의 어느 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대학 선배 3명과 당일치기로 근교 스키장에 갔다. 여름에 잠깐 썸을 탔지만 사랑보다는 우정에 가까운 감정으로 남았던 J군. 처음부터 서로를 전혀 이성으로 보지 않아 사랑 따윈 끼어들 틈이 없었지만 막상 학교에서 1시간 떨어진 거리의 우리 집(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던)에 온 적 있던 유일한 사람인 M군, 그리고 3월부터 한 학년 아래인 내 동기와 연애를 하던 중이라 이미 처음부터 품절남인 셈이었던 H군이 이날 스키여행의 동반자였다. 아, 이렇게 써놓고 보니 굉장히 복잡해 보인다만... 그냥 철없고 웃기고 노는 걸 좋아하는 대학생들이었을 뿐이다.


 아침 일찍, H군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1시간 여를 달려 스키장에 도착했다. 오전 내내 즐겁게 그리고 부지런하게 스키를 탔다. 사람들이 붐비기 전에 서걱거리는 질감의 밤새 쌓인 새 눈을 먼저 즐겨보겠다며. 그렇게 쉬지 않고 몇 시간씩 스키를 타고서, 우리는 스키장에 있는 햄버거집에 가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점심에 곁들인 수다가 너무 맛있어서 그 이후로 스키는 안 타고 햄버거집에 그대로 눌러앉아 쉼 없이 콜라를 리필해먹으며 세 시간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굳이 스키장까지 와서 그렇게 오랫동안 수다를 떨 일인가 싶지만... 사실 그날의 스키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도 그날의 수다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날 만큼 정말 재미있었다.


 그 나이의 청춘남녀가 모이다 보면 자연스레 수다의 주제는 연애, 연애, 그리고 연애로 흘러간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있던 J군, M군, 그리고 H군은 본인들이 또래에 비해 연애경험도 많고 아는 것도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칭 '연애박사'라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터였다. 그런 그들에게 한 살 어린 여자 후배는, 그것도 이미 서로의 연애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어 일부러 숨길 것도 없는 그런 후배는 적당히 허세를 부리면서 연애담을 털어놓기에 좋은 상대이다. 그리하여 당시 연애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오빠들은 그날 내게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법'에 대해 열심히 강의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물두 살 남자애들이 스물한 살 여자애에게 인생의 반려를 만나는 법에 대해 설명해주다니 그야말로 귀엽고, 웃기고, 어이없는 일이다만... 나름 그때는 진지하게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나에게는 '썸'을 타고 있는 남자 선배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썸남'은 현재의 남편으로, 사실 이날 함께했던 J군, M군, 그리고 H군과 우리는 모두 다 같은 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지라 서로가 서로를 제법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게다가 이 날로부터 약 한 달 전 우리는, 그러니까 이날의 스키 멤버 4명과 썸남과 그리고 일주일 전 입대해버린 K군은, 다 같이 스키여행을 떠난 적도 있었다. 썸남은 당시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사회인으로, 취직한 회사의 신입사원연수원에 들어가 있었는데, 한 달 전의 스키여행 이후 부쩍 친해진 우리는 사실은 남들 몰래 영화도 두 번이나 보고, 거의 매일 문자를 주고받고, 연수원에서 취침시간 직전에 꼬박꼬박 전화통화를 하던 사이였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인 일들은 남들 몰래 우리끼리만 이루어진 일이었으므로 이날 함께한 스키여행 멤버들은 우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햄버거집에서 이루어진 세 시간의 연애학 강의 동안, 나는 결국 강사분들에게 '사실 지금 썸을 타고 있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눈치 빠른 M군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그 썸남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며 남편의 이름을 댔다. 나는 눈이 동그래지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캐물었고, M군의 말은 이랬다. 한 달 전의 스키여행에서 자기를 비롯한 모두가 이 자리엔 '이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오로지 썸남만이 '이성이 있는 모드'로 여행 내내 보냈다는 것이다(우리는 나중이 이 모드를 '매너남 모드'라고 작명하여 연애학 공식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다). 곧 군대에 갈 K군도, 그리고 이미 너무나 남자'사람'친구가 되어버린 다른 멤버들도 다들 나를 이성으로 보지는 않았는데, 썸남만은 달랐다는 것. 그날의 스키여행에서도 나는 홍일점이었으므로 결국 썸남이 누구를 위해 매너남 모드를 발동시켰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는 것이었다. 아, 이런 무서운 M군이여. 그는 연애학 박사학위를 받을만했다. 비록 '타인의 연애' 한정이지만.


 그리하여 세 시간에 걸친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법' 강의를 듣고 나서 열흘 후, 나는 썸남과 썸을 타는 단계를 벗어나 공식적으로 사귀는 사이에 진입했다. 보통 연인들이 말하는 '오늘부터 1일'의 카운트가 시작된 것이다. 얼마 후 그는 달뜨고 설레는 연애의 마음만 잔뜩 남긴 채, 한 달 뒤 밸런타인데이 때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군대 같은 신입사원연수원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갓 연애를 시작한 이 설렘을 누구에게든 털어놓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조금씩 연애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는데, 물론 그중에는 우리 연애학 강사 삼인방도 있었다. 나는 결국 그와 사귀기로 했다고 털어놓으며, 열흘 전 오빠들이 이야기한 운명의 상대를 만난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들은 하나같이, '이 답답아!'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닦달했다.

"어휴, 그건 그렇게 쉽게 느끼는 게 아니라고! 넌 아직도 내가 뭘 말하는지 못 알아 쳐 먹었다!"



 

 그리고 15년 뒤, 나는 이제야 말한다. 나는 제대로 알아처먹었었다고.   

 5년 간 연애를 하고, 결혼한 지 이제 10년이 지났다. 세 명의 아이를 두었고 여전히 부부의 사이는 좋다. 지금의 나는 자신 있게 그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를 만난 직후, 그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남편을 '운명'이라고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내 운명의 상대였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려면 그야말로 죽을 때까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그와 맞잡은 손이 너무나 짜릿해서, 도무지 이런 느낌을 주는 상대가 지구 상에 단 한 명이라도 더 있을 것이라는 걸 차마 상상할 수 없어서, 나는 사귀기 시작한 지 1일에 그를 '운명'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서로에게 운명 지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남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그것은 삶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제는 내가 '제대로 알아처먹었다고' 이야기한다면 아마 그들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된 H군과,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고 있는 M군, 그리고 자유로운 싱글남 J군은 내가 지나온 15년의 시간만큼이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쌓아놓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 넷이 만나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20대의 풋풋함과는 또 다른, 그러나 스키장에서 스키는 포기할 만큼 재미있는 또 하나의 사랑학 강의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 결혼한 이후에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이후에는 더 이상 그들을 만나지 않는다. 풋풋한 청춘 남녀가, 아무리 서로를 이성으로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또 아주 짧은 한 시절의 일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알랭 드 보통의 사랑에 대한 책을 읽으며, 필생의 사랑과 함께 떠오르는 건, 그 여정에서 나를 응원해주던 동지들이다.


모두 그들만의 멜로드라마를 한 편씩 찍으며, 살고 사랑하고 그리고 추억하기를.  

다들 잘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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