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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30. 2020

가족 모두를 책 덕후로 만드는 그날까지

매일 책을 읽는 모습이 우리 가족의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활동은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점진적으로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요. 그러다 어느 날,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고래 등처럼 온 가족을 태우고 앞으로 쑥쑥 나아갑니다. 엄마의 활동이 '가족문화'가 되는 순간이에요.
오소희, <엄마의 20년>


 어제저녁, 다소 기이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퇴근한 남편. 퇴근하자마자 거실 탁자에 앉더니 책을 펼쳤다.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소파에 벌렁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건 많이 봤어도, 이런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았다. '웬일로?' 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자 눈이 마주친 남편이 씩 웃으며 답한다.

"이 책이 너무 읽고 싶어서, 빨리 퇴근하고 싶었어."


 자, 문제의 '이 책'이 무엇인고 하니 폴란드 아동문학가 야누쉬 코르착 Janusz Korczak의 <마치우시 왕 1세 Król Maciuś Pierwszy>다. 우리나라에선 시공주니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남편에게 추천한 건 바로 우리 집 북큐레이터 큰 딸. 사실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


 내가 1년에 100권에서 150권의 책을 읽는다면, 아마 우리 큰 딸은 1년에 천 권쯤 읽는 것 같다. 물론 30페이지 그림책에서부터 300페이지가 넘는 고전문학까지 모두 다 헤아렸을 때 나오는 숫자다. 본인이 생각해도 자기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가끔 우쭐대며 엄마는 왜 그렇게 책을 느리게 읽느냐고 핀잔도 준다. 딸아, 나도 다섯 식구 집안일과 너희들의 온갖 뒤치락거리만 아니었으면 하루 종일 책을 읽었을 거야... 하고 투덜대 본다. 물론 딸아이는 나보다 더 뚝심 있게 책을 진득하니 잘 읽는다. 올해 한국에서 폴란드로 입국하는 비행기에선 시간 잘 가라고 800페이지가 넘는 미하일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쥐어줬는데, 밥도 안 먹고 책에 코를 박고 읽더니 비행이 절반쯤 지났을 때 다른 책 없냐고 물어왔다. 제목이 끝없는 이야기인데 이야기가 끝이 나다니. 같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반복해서 읽으니 10시간 비행이 끝이 났다. 무서운 것. 나는 눈알 아파서 그렇겐 못 읽는다.


 책 좋아하는 엄마 밑에서 책 좋아하는 딸이 태어났으니 나는 그저 신나서 딸에게 온갖 책을 갖다 바치는 데에 바쁘다. 딸도 어린이날, 생일날, 크리스마스날... 받고 싶은 선물은 항상 책을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폴란드까지 비싼 택배 배송료도 이런 특별한 날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영어책은 모국어로 된 책만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는데, 또 학교에서는 아쉬운 대로 영어책에 코를 박고 허우적대는 모양이다. 도서관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 교실로 들어갈 때까지 활자와 물아일체가 된 채로 이동하는 딸에게 담임선생님은 'Class Bookworm' 상장을 주셨다. 


 여하튼 이렇게 책 좋아하는 딸과 책 좋아하는 마누라와 함께 살다 보니 남편은 책의 홍수에 빠져 산다. 거실과 5개의 침실, 그리고 하다못해 지하실까지... 우리 집에 책이 없는 공간은 없다. 사실 빈 공간만 있으면 책을 쌓아두고 이미 모든 책장이 가득 찼는데 자꾸 책을 사들이고, 주체할 수 없는 책 욕심에 책을 이고 지고 산다. 그리고 아이들이란... 절대 꺼내본 책을 스스로 책장에 집어넣는 편이 없다. 사실 나도 좀 그런 편이라 할 말은 없고. 바닥에 널브러져 수시로 발에 차이는 책을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우리에게 큰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남편이 얼마 전에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신문기사를 접한 모양이다. 해당 기사는 영상화된 정보에 익숙해지고 문해력이 떨어진 요즘 아이들이 학습시간은 늘어났지만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해서 학습능률이 오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는 딸아이의(그리고 공부는 전혀 하지 않고 허구한 날 책만 읽는 딸아이의) 교육이 걱정스러웠던 걸까. 며칠 전 밥상머리에서 내게 문해력은 어떻게 높일 수 있는 거냐고 물어보길래 내가 아는 선에서 답하다가 그냥 슬쩍 최승필의 <공부머리 독서법>을 책장에서 꺼내서 건네주었다. 마침 토요일 저녁이었고, 여유로운 일요일 하루가 그의 온전한 독서 타임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공부머리 독서법>을 읽다 보니 남편은 큰 딸이 평소 읽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책에서 이야기한 대로 아이와 같은 책을 읽어보고, 아이가 정말로 책의 핵심 내용을 짜임새 있게 잘 파악하고 있나 물어보고 싶어 졌을 것이다. 그는 새롭게 배운 것은 즉각 실행해보고 싶은, 실험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니까.

"주영아, 네가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뭐였어?"

아빠의 질문에 딸아이가 가져온 책이 바로 이, <마치우스 왕 1세>다.


 1년에 책을 천 권쯤 읽는 아이가 가장 재미있었다고 가져온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을 추천받아 읽기 시작한 남편. 월요일 저녁. 그는 퇴근하자마자 책을 펼쳐 드는 기이한 광경을 보여주고, 화요일 새벽.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새벽 4시 반에 눈이 떠졌는데,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잠든 아이를 깨울까 봐 불을 켜고 책을 읽을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까웠다고 한다. 이쯤 되니 아니 대체 얼마나 재미있는 책이길래 남편이 저렇게까지 빠져서 읽나 너무 궁금하지만... 그가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다. 출근한 남편의 책상 위에 떡 하니 올려져 있는 책을 슬쩍 들춰보니 300페이지 넘게 읽었다. 



 남편이 이 책을 다 읽걸랑 이다음엔 내가 슬쩍 책을 추천해봐야지.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를 은근슬쩍 그의 책상에 올려둬 볼까 생각 중이다. 과연 이 책만큼 열렬한 반응을 남편에게서 끌어올 수 있을지.. 사실 자신은 없다. 혹시 그럴만한 책이 있다면 댓글로 꼭 추천해주시기를. 비 오는 화요일 저녁, 빗소리와 함께 책장이 사각거리며 넘어가는 소리를 음악처럼 듣는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면서 내가 꿈꿔왔던 풍경을 감상한다. 


 매일 책을 읽는 모습이 우리 가족의 문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남편과 저는 서로 매우 다른 사람이었지만 공통의 가족문화 속에서는 깊이 교감했어요. (중략) 엄마의 활동은 어떤 식으로든 한 가정에 문화를 형성합니다. 그 문화가 뚜렷이 자리 잡을 경우, 다시 자식이 자기 자식에게 그것을 대물림하게 되어 있어요. 한 가정의 문화가 '전통'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지요.
<엄마의 20년>,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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