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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27. 2020

나도 남편보다 쪼끔 더 벌었으면 좋겠다

왕창 더 벌면 더 좋고

 경제학 이론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내 가장 친한 친구 다섯 명의 연봉을 다 더해서 평균을 내면 내 연봉과 매우 근접한 액수가 나온다는 이론이다.
- 오스틴 클레온 저, <훔쳐라, 아티트처럼>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빠르게 내 친구들의 연봉을 생각해봤다. 다섯 명의 얼굴이 빠르게 떠올랐으면 좋았겠지만 순식간에 떠오른 얼굴은 딱 네 명이었다. 두 명은 어느새 대기업 입사 10년이 넘어간 워킹맘들. 학력도 높고, 전문성도 있는 데다 둘 다 우리나라 시가총액 10순위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잘 나가는 친구들이었다. 다른 두 명은 전업주부. 한때 안정적이고 인정받는 직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어린아이들을 돌보느라 출산과 함께 커리어가 멈춰버린 우리 사회의 흔한 '82년생 김지영'들이었다.


 이제 나머지 한 명의 친구를 누구로 생각하냐에 따라서 경제학적 이론에 따른 나의 추측 연봉은 매우 달라질 셈이었다. 지금까지는 딱 반반. 워킹맘을 넣느냐 전업주부를 넣느냐의 그 갈림길에서 나는 다섯 번째 친한 친구를 선뜻 찾지 못했다. 여기서부터는 평균 연봉을 높이기 위해 다분히 주관적인 내 의견이 들어가기 쉬운 지점이었다. 일하는 엄마를 넣자니 가정과 회사를 오가는 그녀들은 사실 너무 바빠서, 게다가 내가 유럽에 와서 살게 된 2년 전부터 연락이 많이 뜸해진 셈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말 우리가 그렇게 친한가? 그냥 내가 연봉 평균값을 올리고 싶어서 데려온 거 아니야?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전업주부 친구들을 넣자니... 뚝 떨어질 연봉 평균을 생각하면서 왠지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누구를 더 넣어야 대체 내 평균 연봉을 제대로 계산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얼마를 벌까? 그리고 앞으로 얼마를 벌 수 있을까?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 중에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손에 쥔 책이 있다. '남편보다 쪼끔 더 법니다'. 사실 남편보다 쪼끔 더 많이 벌고 싶은, 그래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이 내 속에도 득실득실 넘친다. 그러나 남편보다 많이 벌기는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남편은 지금 꽤 많이 번다. 


 남편이 버는 돈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자면 사실 우리 남편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30대 사실은 40대인데 만 나이로 30대인 직장인이다. 월급쟁이다 보니 매우 투명한 유리지갑과 그에 상응하는 세금을 내며 세전소득과 세후 소득의 차이가 꽤 많이 난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는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적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남편을 보고 '많이 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주재원을 나온 우리 가족에 현실에 기반한다. 해외에 나와 살다 보니 주재국에서 내는 집세, 아이들 국제학교 학비, 그리고 추가적인 주재 수당. 이 모든 것들이 남편의 월급에 포함된다. 대부분 실제 지출과 관련된 소득인지라 그야말로 통장을 스칠 뿐. 받는 그대로 나가는 돈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 것을 합한 총액은 적은 액수가 아니기 때문에 서류상 남편의 월급은 일반적인 한국 직장인의 연봉을 크게 상회한다.


 그런데 주재지 생활이란 게 사실 가족들의 큰 희생에 기반한다. 아이들은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다른 학교에서 적응해야 한다. 사실 우리 둘째 아이 같은 경우는 매일 아침 복통을 호소할 정도로 적응과정에서 너무 힘들어해서 그냥 1년 동안 유치원을 통으로 쉬고 가정보육을 했다. 1년쯤 지나 영어 실력도 좀 늘고, 아이도 그동안 키즈카페나 놀이터에서 현지 아이들과 부대껴본 경험이 생겨서 유치원으로 복귀했는데...  딱 두 달 만에 코로나바이러스로 휴교령이 내렸다. 


 힘든 해외 양육과 더불어 엄마의 가사노동도 만만치 않다. 반찬가게도 없고 배달음식도 없는데 가족들 입맛은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제한된 식재료로 식구들의 입맛을 맞춰야 하니 엄마의 가사부담은 200% 증가한다. 예를 들어 여름에 팥빙수를 먹고 싶으면 전날 찹쌀을 불려 고명으로 올릴 찹쌀떡을 만들고, 팥을 삶아 팥앙금을 만들고, 우유를 설탕에 조려 연유를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배달의 민족에 전화 한 번 하면 배달되어 올 설빙 팥빙수를 미친 듯이 그리워하면서 만들기 시작한 지 24시간 후에 팥빙수가 완성되어 나온다. 김치도 직접 담가 먹고, 나물도 일일이 다듬어가며 손수 무친다. 아파트 상가에 득실대었던 반찬가게들을 그리워하면서 또다시 24시간 동안 한국에서 공수해온 말린 나물을 찬물에 불린다. 특히 통마늘을 손으로 일일이 껍질을 까며 가내수공업으로 다진 마늘을 만들 때면 이 모든 것이 아웃소싱이 가능했던 한국의 시스템이 격하게 절실해진다. 이 과도한 가사노동과 더불어 육아를 도와줄 조부모도 없고 말이 통하는 베이비시터를 구하기도 어려우니 24시간 육아도 오로지 엄마의 몫인 셈. 게다가 혹여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이곳의 의료시스템 상 병원 한 번 데려가는 것도 정말 큰 일이다. 더 조심하고, 더 세심하게 아이를 돌보는 수밖에. 엄마는 그냥 먼 타국 땅에서 밤낮없이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신데렐라가 되고 만다.


 그래서 만사에 자기중심적이고 나 좋은 대로 일을 해석하기 좋아하는 나는 '주재원이어서 받는 연봉'과 '한국에서 원래 받던 연봉'의 차익을 내 멋대로 현재 나의 월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물론 남편은 그게 왜 네 월급이냐며 발끈했지만, 원래 가정법원에서 재산분할할 때도 외벌이 소득의 절반은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했던 전업주부의 몫으로 계산하지 않던가. 그렇게 계산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좀 편했다. 나의 이 모든 허튼짓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야. 사회 초년생 연봉만큼은 되잖아? 나는 지금 열심히 돈을 벌고 있어.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라고 애써 현실을 긍정해본다. 

 

 실제로 현실의 내가 버는 돈은 아이들 과자값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가끔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쓰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풀타임 전업주부로 살면서 버는 이만큼의 돈을 내 평생 연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의 잠재적 연봉은 더 크고, 나는 언젠가 남편보다는 쪼끔 더 버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본다. 아니, 기왕이면 남편보다 왕창 더 벌면 좋고. 그렇게 생각하며 내 잠재적 연봉을 계산할 다섯 번째 평균값의 주인공은 누구로 넣어야 할지 빠르게 뇌를 스캔한다. 그리고 일기장에 자기 확언의 메시지를 넣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는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룻밤 정도 고민하다가 다섯 번째 친구로는 남편을 넣기로 했다. 우리는 나름 매일 얼굴을 보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가끔 영화도 보고 함께 술도 마시는 짱친, 절친이니까. 경제학 이론에 따라 계산된 나의 평균 연봉은 훌쩍 뛰었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자라고, 다시 나에게도 사회로 복귀할 날이 오겠지. 그날을 상상하면서 오늘도 나태해지지 않고 총알을 장전하고 있어야겠다. 나는 언젠가 남편보단 쪼끔 더 벌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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