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시월이면 기억하고 싶은 얼굴이 있다
그 생각을 안고 집으로 향하던 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지하철 안, 무심코 고개를 들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호계의 대각선 앞에, 왈라비가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켜진 형광등 탓에 청회색으로 느껴지는 열차 안, 몸을 웅크리고 앉은 왈라비는 조금 전 군중 속에 있을 때와 달리 침울해 보였다. 한동안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갑자기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거추장스런 털뭉치가 달린 요란한 볼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메모의 중간중간 폭폭 한숨을 내쉬면서.
손원평 소설, <프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