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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Oct 20. 2020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만난 그녀

해마다 시월이면 기억하고 싶은 얼굴이 있다

 그 생각을 안고 집으로 향하던 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지하철 안, 무심코 고개를 들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니까 호계의 대각선 앞에, 왈라비가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켜진 형광등 탓에 청회색으로 느껴지는 열차 안, 몸을 웅크리고 앉은 왈라비는 조금 전 군중 속에 있을 때와 달리 침울해 보였다. 한동안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그녀는 갑자기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거추장스런 털뭉치가 달린 요란한 볼펜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메모의 중간중간 폭폭 한숨을 내쉬면서.

손원평 소설, <프리즘>


 서울의 지하철이란 진짜 이상한 공간인 것 같다. 나는 2005년부터 2014년까지, 중간에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랑 출산을 하고 일 년 반 동안 학교를 쉬었던 기간 외에는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2호선 21개 정거장. 왕복으로 42개 정거장을 매일 스쳐 지나갔다. 그 안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우. 연. 히 만났다.


 바로 눈 앞에 앉아있는,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는 임신부가 전 여자 친구인 줄도 모르고 내 실명을 거론하며 옆사람과 내 얘기를 하고 있던 구남친도 있었고(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옛말은 하나 틀린 거 없으니 공공장소에선 무릇 말을 조심해야 한다), 상행선과 하행선이 같은 역에 동시에 도착해서 잠시 멈췄던 찰나에 유리창 너머로 지인을 만나 어? 어! 하며 스쳐 지나가던 적도 있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알고 있던 선배가 내 옆자리에 앉아있어서 으엉? 하는 이상한 감탄사로 인사를 한 적도 있었고, 초등학생 때 같은 학원에 다녔던 동네 친구를 15년 만에 우연히 만난 장소도 지하철 열차 안에서였다(둘 다 쭈욱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막상 동네에선 한 번도 안 마주쳤다). 그렇지만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났던 특별한 사람을 떠올리면 늘 항상 떠오르는 건 대학 동기 J 양이다. 내가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있었을 때, 나와 같이 노약자석에 앉아 있었던 동갑내기 그녀.


  나는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두 달만에 결혼하는, 당시로서는(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파격적인) '이른 결혼'을 했다. 연애기간이 오래됐었고, 어차피 더 있다가 20대 후반에 결혼한들 파트너를 바꿔 다른 남자랑 결혼할 것도 아니었고, 예비 시부모님의 연세가 많았다는 점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스물다섯 살에 뭘 안다고 결혼을 결심했는지 그저 기가 찰뿐이다. 그런데 나 못지않게 기가 찬 결심을 한 동기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J 양이었다. 유난히 머리가 비상하고 성실했던 그녀는 학점 따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심리학과에서 과탑을 몇 번 차지하고 장학금도 타더니, 남들보다 한 학기 앞서 조기졸업을 했다. 일 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는 오랫동안 교제해왔던 연인과 결혼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스물네 살 가을에 결혼했던 그녀와 스물다섯 봄에 결혼했던 나. 졸업, 취직, 결혼 등의 인생의 발달과업을 KTX에 탄 것처럼 초스피드로 해치워나가던 우리들이었다.


 J양과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사이코드라마를 연구하는 같은 학회에 있었다. 방학이면 우리는 2박 3일 과정으로 집단상담을 떠났고, 둘 다 사이코드라마 전문지도자 과정에 관심이 있어서 역시 2박 3일로 진행됐던 초급 전문가 과정을 함께 수료하기도 했다. 집단상담을 위해 떠나는 여행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 내려가 함께 먹고 자고 마시며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한 톨도 남김없이 탈탈 털어놓고 내려오는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시절 내내 때마다 그 여행에 함께했던 J양은 어쩌면 대학 동기 중에 서로의 눈물을 가장 많이 본 사이이기도 했다. 서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오히려 학교 강의실에서는 좀 데면데면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비혼주의자가 넘쳐났던 20대의 학교 캠퍼스에서, 결혼을 일찌감치 삶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그걸 전제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나가는 동지가 있다는 건 얼마나 든든한 일인지 모른다. 그녀가 일 년 간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연구실은 달랐지만 나와 비슷한 전공인 아동상담을 선택했다는 것도 왠지 의지가 되었다.

 

 9월 개강 첫 주에, 나는 다른 동기를 통해서 그녀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다. J양은 결혼한 지 일 년쯤 지났지만 한창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중이었고, 결혼을 했다는 것과 임신은 또 다른 이야기인지라 나는 그 소식에 깜짝 놀랐다. 어머머머머머머.... 진짜? 하며 감탄하던 나의 뱃속에서 우리 첫째의 원형이 되었던 수정란이 한참 세포분열을 하고 있던 줄은 전혀 모르고. 그녀의 출산예정일은 3월, 나의 출산예정일은 5월. 그렇게 우리는 또 비슷하게 삶의 궤적을 맞춰가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 그러니까 그 해 10월 딱 이맘때쯤이었을 거다. 나는 세상 경이롭고 끔찍한 입덧으로 임신의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대학원 연구실이라는, 내가 하루에 9시간씩 보내는 그 장소는 한창 입덧을 하는 임신부에게는 최악의 공간이었다. 일반 직장과는 다르게 '식당'이라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 대학원생들은 보통 학교 매점에서 김밥이나 떡볶이 같은 분식을 포장해와서 연구실에서 먹거나, 연구실로 외부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다. 아침식사마저 길거리 토스트나 삼각김밥 등을 포장해와서 자기 책상에서 먹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쇄용지와 잉크 냄새와 더불어 연구실에 항상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것은 음식 냄새였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냄새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그 모든 냄새 입자들에 하나하나 세심하게 반응하는 내 몸도 미스터리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냄새의 향연을 하루 종일 버텨내는 하루의 끝이면, 나는 온갖 사람 냄새들로 가득한 저녁 6시의 지하철 2호선으로 내 몸을 옮겨야 했다.


 퇴근길 지하철 2호선에서 일반 좌석에 자리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현재 나의 신분은 임신부. 비록 임신 초기라 배는 콩알만큼도 나오지 않았지만, 당당하게 노약자석에 앉을 수 있었다. 병원에 가지 않는 날에도 출퇴근길에는 항상 산모수첩을 휴대했기 때문에 내게는 나의 임신을 의학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는 서류인 산모수첩도 있었다. 그렇지만 새파랗게 젊은 애가 노약자석에 앉아있다며 해코지를 당했다는 일화가 여기저기서 심심찮게 들려오던 때라서(게다가 10년 전에는 핑크색 임산부 좌석도 없던 시대인지라...), 늘 노약자석에 앉을 때마다 혹시라도 재수가 없어 누가 시비라도 걸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지하철에 앉을 때면 모자를 눌러쓰고 이어폰을 꼽고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말 걸지 마시오'라고 온몸으로 항변하는 듯.


 그날도 그렇게 모자를 눌러쓰고 눈을 감은 채 노약자석에 앉아있는 데, 옆자리에 어떤 젊은 여자가 앉았다. 실눈으로 옆사람의 착장만 슬쩍 확인하고 오늘은 이 자리에 앉은 임신부가 나 혼자가 아니니 딱히 시비 걸릴 일은 없겠구나 하고 안심했었다. 그런데 옆자리의 여자가 부스럭 부스럭 필기구를 꺼내더니 노트에 뭔가를 급하게 적는다. 언뜻 보니 필통에 우리 학교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나처럼 학생인가 보네... 하고 곁눈질로 그녀의 소지품을 스캔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가방에서 영어 논문을 꺼낸다. 지하철에서도 틈틈이 논문을 읽는 저 성실함이라니. 감탄하며 논문의 제목을 읽는데, 어? 언뜻 제목만 읽어도 이건 내 전공 논문이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옆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J 양이었다.


 지하철 옆자리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나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이렇게 노약자석에 나란히 앉아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어깨를 툭 치고, 서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둘 다 같은 캠퍼스로 매일 출근하고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그녀를 만난 적이 없으니 어연 1년 만이었다. 그새 J양의 배는 나와는 다르게 아주 조금 볼록 나와있었다. 둘 다 일상적으로 산모수첩을 휴대하고 다니는 것도 똑같았다. 논문과 필기구는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서로의 초음파 사진을 꺼냈다.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는 마음, 임신한 몸으로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힘듦, 그리고 출산 이후의 커리어에 대한 막막한 마음. 몇 년 전 집단상담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그 마음들이 이상하게 그녀 앞에서는 술술 쏟아져 나왔다. 비슷한 경험을 함께 겪어나가는 중이기에, 나를 온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아쉽게도 지하철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내 입덧이 괜찮아지면 다음에 학교에서 밥이라도 한 끼 먹자는 의례적인 인사를 남기며 서로 헤어졌다.


 나는 그 날의 인사가 그렇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 몰랐다.




  그동안 나에게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임신 중에 몸이 너무 힘들어 출산 전까지 목표했던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고, 출산하고 나니 '차라리 뱃속에 있었을 때가 열 배는 더 편했구나.'라는 걸 절감했다. 아이가 9개월쯤 되었을 때 출산휴학 기간은 끝나고 복학을 해야겠는데 당시 법적으로 대학원생은 직장여성으로 분류되지 않아서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일정 이상의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베이비시터를 구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한 학기 연장했는데, 휴학계에 제출할 서명을 받으러 여학생 휴게실에서 모유수유를 해 가며 지도교수님 연구실을 찾아갔더니 그럴 바에는 휴학을 할 게 아니라 그냥 그만두지 않겠냐고 권유하셨다. 애엄마가 커리어를 쌓아간다는 게 이런 거였냐며,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절. 문득 J양은 어떻게 하고 있나 궁금했지만, 그녀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나와는 달리 힘들지 않게 복학했다면 그건 내게 속상한 일이었을 테고, 또 그녀도 그녀 나름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굳이 이야기를 꺼내서 서로 속을 긁어대면 뭐하나 싶어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남들처럼 아기 키우는 걸 힘들어했던 것처럼, 그녀도 그저 남들만큼만 힘들고, 남들만큼만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나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건, 내가 딱 그만큼밖에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야가 한없이 좁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던 그때의 내가 너무 밉고 속상하다.  


 임신 말기에 그녀는 뇌에 종양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러나 건강한 출산을 위해 치료를 잠시 몇 달 미뤘고, 그 사이에 종양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이를 낳은 직후부터 세상을 떠났을 때까지 약 18개월 동안 그녀는 항암치료를 받고, 시골로 요양을 가며 병을 이겨내고자 노력했지만... 결국 두 살짜리 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던 10월. 그녀의 부고를 듣고 황망한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장엔 내 딸아이와 고만고만한 나이의, 그녀를 똑 닮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장례식장에 모인 수많은 이모와 삼촌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옆 장례식장엔 천수를 누리다 간 누군가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는지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이름에 손자 손녀 이름까지 못해도 스무 명의 상주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그 옆 모니터에 친구 남편의 이름과 2살 아이의 이름만 단출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친구가 두고 간 아이를 생각하면 그것도 너무 속상하고, 그리고 아이를 생각하며 내가 상상도 못 할 슬픔을 느꼈을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했다.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며 그렇게 힘든 투병 시간을 보냈을 J양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그런 그녀를 떠올리며 딱 나만큼 비슷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섣불리 단정했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다. 그때는 셋째 임신이라 아주 일찍부터 배가 남산만 하게 불렀는데, 덕분에 떳떳하게 그 자리에 앉았다. 그 몇 년 사이에 얼굴도 조금 삭았고, 엄마로 살아온 시간이 꽤 쌓였던 만큼 얼굴도 두꺼워졌다. 혹시라도 해코지 당할까 봐 초조해하며 노약자석에 앉던 스물다섯의 나는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J양 생각이 나며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문득 그 순간의 장면과 분위기와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이랑 겹쳐 보였다. 생각해보니 10월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지하철에서 만났던 것도 10월, 장례식장에서 떠나보냈던 것도 10월, 지하철에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펑펑 울어댔던 것도 10월,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10월.


 그래서였을까. 손원평 작가의 <프리즘>에서 호계가 예진을 우연히 지하철에서 만나는 장면을 읽는데 친구 생각이 났다. 사실은 지하철이라는 공간 외에는 그날의 상황과 겹치는 게 딱히 없었는데, 장면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달력을 찾아보니 그날이 기일이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그녀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혹여 이승에 남아 있더라도 이 먼 땅 폴란드, 내 곁은 아닐 것이다. 아마 아이와 가족들 옆에 머물러있고자 하겠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에 대한 나의 추억을 글로 남기는 것에 대해 망설여졌다. 수년간 제대로 연락조차 안 하던 사이였던 우리가 그저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나 혼자 친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지. 대학 시절의 우정보다도 짧은 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그녀에 대한 아쉬움이 지금 이 애틋한 마음의 근원은 아닐지. 그래서 과연 이런 글을 내가 공적인 공간에 쓸 자격이 있는지 망설여졌다. 하지만 해마다 이 계절이 되면 한 번쯤은 친구 생각이 났다. 시월의 폴란드에서 만성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모습을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그녀였다. 영화 <코코>에서 나왔던 것처럼 세상을 떠난 그녀의 영혼이, 그녀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생기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라면... 그녀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겨보기로 결심했다.  


 내 아이와 나이가 똑같았으니 이제는 10대가 되었을 친구의 아이를 생각해본다. 엄마의 얼굴은 사진으로만 기억에 남아있을 아이. 언젠가 그 아이가 커서 엄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을 때, 하나쯤은 엄마의 지인이 남겨놓은 글이 어딘가에 있어도 좋지 않을까 라는 마음으로 썼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모아, 네 엄마가 얼마나 아름답고 찬란하고 빛나는 사람이었는지 알려주면 좋겠다. 나의 기억도 그 한 조각으로, 부족하지만 어떤 완성된 형태로 아이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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