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되는 신 (2) :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Amor Fati)에 대하여
이 글은 [1편: 고통받는 신은 어떻게 승리했는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편에서는 기독교가 어떻게 허무해진 로마의 지성인들을 사로잡았는지를 살펴보았다.
니체가 기독교와 대비시킨 것은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이다. 니체에 따르면 기독교의 뿌리에는 죄책감과 원한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 종교의 중심에는 삶에 대한 넘치는 긍정이 있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과 닮아 있다. 그들은 사랑하고 질투하며 분노하고 실수한다. 그리스인들은 신을 통해 인간의 본능을 긍정하고 찬양했다. 그들에게 신은 나약한 자신을 구원해 줄 존재가 아니라 이 벅찬 생명력을 함께 즐기는 존재였다.
기독교가 인간의 욕망을 죄로 규정할 때 그리스인들은 그 욕망마다 신의 이름을 붙였다. 질투는 헤라가 되었고, 전쟁은 아레스가 되었으며, 사랑은 아프로디테가 되었고, 도취와 광기는 디오니소스가 되었다. 그들은 신을 통해 “인간의 모든 본능은 신성하다”라고 선언했다. 니체는 이것을 인간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고결한 방식으로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고통과 죽음조차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비극적인 운명마저도 예술로 승화시켰고 그런 삶을 허락한 운명 자체에 감사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아모르파티’,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태도의 원형이다.
그리스 종교의 완성도는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균형에 있다. 이성과 형식에만 갇히지도, 광기와 파괴에만 빠지지도 않는 상태. 니체에게 그리스 신화는 나약한 인간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라 강한 인간을 더욱 빛나게 하는 세계관이었다.
니체가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 위버멘쉬는 이러한 그리스적 정신과 닮아 있다. 삶을 긍정하고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기 한계 내에서 맞서 싸우고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 그는 이것을 인간이 도달해야 할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자세로 보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고대 그리스가 완벽했던 건 아니다. 니체가 그리스로 돌아가자고 말한 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태도의 회복이었다. 아주 작은 고통 앞에서도 초월적 존재에게 매달리는 나약함 대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는 당당함을 되찾으라고 외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교인 나에게는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를 인간 심리로 해석한 니체의 통찰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의 신화 중 기독교가 결국 지금까지 지배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갖고 있는 힘은 엄청난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숨어있는 의미를 해석해 본다면 결국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한다는 심리가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래서 그것과 정반대에 서있는 니체가 나에게는 강하게 끌리는 것 같다. 나 역시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 그게 진리이며 정답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극복하고 싶다는 심리 역시 반대편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나에게 니체는 스스로 서서 의미를 창조하라고 요구한다.
아직은 그 요구가 두렵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을 통해 삶을 긍정했듯 나는 신 없이도 이 삶을 좀 더 생명력 있게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나만의 법칙을 만들어 가고 싶다. 그것이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나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