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를 비판한 니체가 구약성서는 극찬한 이유

안전한 가축으로 살 것인가, 전율하는 인간으로 살 것인가

by selves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했지만 구약성서는 긍정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꽤 놀랐다. 니체가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정의에 대한 책인 유대인의 '구약성서'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양식으로 인간과 사물 그리고 말이 표현되고 있어서 그리스와 인도의 문헌에는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다.


니체에게 유대인의 경전인 구약성서는 단순한 종교 문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 신의 정의를 다루는 위대한 문학적 형식이었다. 그는 구약성서가 인간의 욕망과 분노, 삶의 비극을 표현하는 방식을 극찬했다.


그리스 문화를 그토록 사랑한 니체가 구약성서 앞에서는 그리스 문학조차 가벼운 유희처럼 보일 뿐이라고 했다. 구약성서가 갖고 있는 묵직한 심연의 무게를 인정한 것이다.


인도 철학에 대해서도 구약성서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인도 철학이 자아를 해탈시키고 무로 돌아가는 ‘부정의 논리’를 강하게 지닌 반면, 구약은 고통스럽더라도 현실의 삶과 인간을 강렬하게 긍정하는 ‘의지’를 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체가 구약성서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이었다. 구약의 인물들은 신과 다투고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회피하지 않는다. 니체는 이것을 '나약한 자들의 위로'가 아닌 '강한 자들의 기록'으로 보았다.


반대로 니체에게 현대 유럽 문학과 기독교의 신약성서는 지나치게 온순하고 도덕적이며 수다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그에게 구약성서는 현대인이 흉내 낼 수 없는 거대한 피라미드나 고대의 거석 기념물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신과 인물들은 현대인처럼 소심하게 눈치를 보거나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르며, 자신의 운명을 거칠게 밀어붙인다.


기독교가 삶의 고통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약화시킨 반면 구약은 삶의 잔인함, 복수심, 승리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숨김없이 드러난 인간의 본능과 그 본능을 장엄한 언어로 기록한 형식을 보며 니체는 인류가 잃어버린 '정직한 생명력'을 발견한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위로받고 싶은 군중으로 남을 때가 아니라 운명과 맞서는 개인이나 민족일 때 강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런 집단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이라고 여기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생각은 위험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 그것은 타인을 억압하기 위한 사상이 아니라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내적 긴장이었다.


미국에 거주하며 수많은 유대인들을 본다. 한 번은 유대인의 성인식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자기들만의 의례로 성인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종교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은 자부심과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그것이 인생의 큰 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체가 말한 '타인과 다르다는 감각' 즉 거리의 감정이 어떻게 한 개인과 민족을 강하게 만드는지 목격한 순간이었다.


니체는 역사적으로 박해받아온 유대인들이 경제, 문화, 학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유대교라는 강한 종교적 전통과 고통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는 힘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힘의 바탕에 구약성서가 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 구약성서를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유약하고 온순한 가축에 지나지 않으며 단지 가축이 가진 욕구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은 저 폐허 앞에 서서도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 문장은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니체는 현대 기독교 문명과 민주주의가 인간을 '길들였다'고 보았다. 야생의 늑대였던 인간이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말 잘 듣고 온순한 '양'이나 '가축'이 되었다는 뜻이다. 가축의 최대 관심사는 세 가지다. 안전, 먹이(안락), 그리고 무리 속에 섞여 있다는 안도감.


현대인은 삶의 거대한 모험이나 위험, 비극적 숭고함을 추구하기보다 그저 "오늘 하루도 무탈하고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행복에만 매몰되어 있다는 비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 역시 길들여진 존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큰 결핍이 없다는 이유로, 무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니체가 말하는 길들여진 인간은 너무 나약해져서 거대하고 위대한 문화 유물을 보고도 그것의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으며 우리가 그런 위대함을 잃어버리고 이토록 작아졌다는 사실에 대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반면 고결한 인간은 위대한 과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고 자신의 초라함을 반성하며 다시 그 높이에 도달하려 애쓴다.


최소한 그 위대함 앞에서 두려움과 전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위대함을 열망하는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나마 이런 글을 읽고 무언가를 느낀 나도 조금은 희망이 있는 걸까?


민주주의 시민으로 자라난 내게 니체의 사고방식은 아직 완전히 흡수하기에는 힘든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일함에 안주하는 삶에 대한 그의 서늘한 경고만큼은 유효하다. 나는 더 이상 길들여진 가축으로만 남고 싶지 않다. 위대한 생명력 앞에서 경외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내 삶의 높이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고 싶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나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어떤 모험을 선택하며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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