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잘못까지 나의 일부로
미안함이라는 감정은 뭘까?
이성이 없는 동물들도 미안함을 느낄까?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가 꼬리를 내리고 눈치를 보는 모습은 언뜻 미안함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반응에 가깝다. 인간의 미안함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묻게 하는 감정이다.
미안함이 타인의 상처를 살피는 마음이라면 그 깊은 중심에는 나 자신의 도덕성을 심판하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불편함을 남겼다는 인식.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실수를 자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도덕성을 의심한다. 그래서 이 감정은 유난히 무겁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이 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다.
어떤 이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그것을 분노로 변환한다.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오히려 상대에게 화를 내며 방어막을 친다. 혹은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합리화로 상황을 탓한다. 그 외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처 준 대상에게 유난히 친절을 베풀며 보상하려 든다. 냉정히 따져보면 그 친절은 타인을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죄책감에서 탈출하기 위한 심리적 비용일 때가 많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의 평안을 위해 사과하고 보상한다. 그만큼 죄의식은 인간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지닌 존재라는 ‘원죄’의 프레임을 씌우고 죄책감을 자극해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가 형성된 것 역시 인간의 이러한 심리를 보여준다. 죄를 전제해야 용서가 의미를 갖는다. 죄의식은 인간을 억누르면서도 동시에 결속시키는 강력한 힘이다.
죄책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동력 중 하나다. 마음속 무거운 짐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인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변호한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그것이 내 의지의 전부는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환경이 그랬다고, 순간의 감정이 그랬다고,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그랬을 거라고. 죄책감은 우리를 정직하게 만들기보다 때로는 교묘하게 영리하게 만든다.
사실 인간이 하는 일들이 꼭 본인의 의지만으로 된다고 말할 수도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사유처럼 인간의 행동은 때로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휩쓸려 일어나는 사건이기도 하다. 니체는 죄를 개인의 도덕적 결함으로만 보지 않았다. 다만 그 흐름에 떠내려간 결과물조차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내 삶의 일부로 끌어안으라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운명애(Amor Fati)다. 어려운 일이다.
거창한 죄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순간에 이 운명애는 시험대에 오른다. 어느 날 아이의 몸이 뜨거운 것 같아 당황한 마음에 해열제를 먼저 먹였다. 뒤늦게 잰 체온계 수치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삼켜버린 약은 돌이킬 수 없다. 그 순간 밀려오는 것은 '내가 성급했구나' 하는 자책과 아이에게 해가 될까 두려운 엄마로서의 죄책감이다. 그때 나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스스로도 설명하기 힘든 그 찰나의 성급함 또한 나의 일부일까?
이처럼 사소한 일에서도 우리는 쉽게 죄책감을 느끼고 어떤 힘에 영향을 받는다. 하물며 돌이킬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온전히 인정하고 “이것은 내 의지로 저지른 죄이며 나는 그 벌을 달게 받겠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변명하지 않고 축소하지 않고 타인에게 떠넘기지 않는 용기.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결단을 넘어선다. 그것이 설령 불가항력적인 흐름이었다 해도 그 결과물까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숭고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다. 연약하고 쉽게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심판하고 해석하려 한다. 죄책감은 우리를 작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를 더 깊은 성찰로 이끌기도 한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끊임없이 실수하고 후회하고 다시 흔들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흠 없는 무결한 삶이 아니라 그 이후의 태도에 있다. 도망치지 않고 나의 잘못까지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용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