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유혹 1

커피의 유혹

by 국화향기

퇴근해서 집에 들어갔더니 식탁 위에 허리가 잘린 페트병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도 이것저것 만들어 어지럽히던 아들 녀석의 짓이라 짐작이 되니 갑자기 확 짜증이 났다. 이제 중학생도 되었으니 엄마를 도와줄 법도 한데 녀석은 여전히 정리를 할 줄 모른다. 보통 때 같으면 말없이 하나씩 치우는데 오늘은 좀 피곤했는지 화부터 났다.

“이 녀석아, 쓰레기가 생기면 빨리 치워야지 여기에 이렇게 올려놓으면 어떻게!!”

학원을 마치고 들어오는 아이에게 짜증 섞인 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머니, 이건 쓰레기가 아니고, 제가 어머니 주려고 만든 더치커피 기구예요. 자 보세요.”

책가방을 채 내려놓지도 못한 채 억울한 표정의 아들은 페트병 두 개를 가지고 더치 원두커피를 내리는 장치를 설치한다.

“너 핑계 대지 마. 엄마한테 또 혼날까 봐 엉뚱한 소리 하고 있지?”

“아, 글쎄 몇 시간만 기다려 보세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더치커피가 만들어질 거니까요.”

더 이상 잔소리할 기운도 없고 해서 녀석이 하는 대로 놔뒀더니, 정말로 페트병 두 개에서 한 방울씩 커피가 떨어져 더치커피가 만들어진다.


“거 봐요. 어머니. 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근사하게 얼음까지 띄워서 내주는데 제법 카페에서 사 먹던 더치커피의 맛이다. 얼마 전에 학교 자율 동아리 부서로 바리스타 부서를 들어간다고 용돈을 받아가더니 아마 거기서 배운 것인가 보다. 커피 한 잔에 불같이 끓어오르던 화가 어느새 기분 좋은 미소로 변해 버렸다.


운동 후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일상이 되어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마시게 되는 커피.


이것들은 여러 가지 중에서도 내가 가장 뿌리질 수 없는 일상의 유혹들이다.

좋아하면 그냥 즐기면 되지 뭐가 문제가 되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유혹인지라 의지의 약함에 대한 자책과 번민은 늘 풀지 못하는 나의 숙제이기도 한다. 믹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를 다이어트 성공의 축하 의식으로 삼고 있는 앞집 아줌마를 보더라도 그 유혹의 강도는 가히 토네이도 급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가 마시고 싶다.

출근을 한 직후에 커피가 마시고 싶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언제나 커피가 마시고 싶다.

점심 식사 후에는 커피가 마시고 싶다... 등등


하루 중에 커피를 마시고 싶은 때를 나열하고 보니, 커피 대신 담배로 넣어도 문구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 이런 것을 중독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커피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선호하는 종류가 있거나 대단한 도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구수한 맛이 좋을 정도, 간단한 커피 메이커, 수동 커피 그라인더, 저렴한 핸드 드립 도구들, 아이가 만들어 준 페트병 두 개로 만든 더치 기구... 뭐 그 정도이다.


산미가 풍부하다는 커피의 맛을 평할 때 쓰는 말도 가끔 원두를 사러 가는 카페 총각에게 주워들은 말이다.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그저 “전 신게 싫어요.”라고 했더니 “산미를 싫어하시는군요‘라고 하길래 커피에서 느껴지는 신맛을 산미라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은 수동 그라인더가 있는 것도 솔직히 말하자면 카페 총각에게 커피 좀 마셔 본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는 얄팍한 허세 때문이었다. 매 번 갈아놓은 원두를 사 가는 초보 커 피러(coffeer) 보다는 가끔은 그라인딩 하는 원두의 향을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랐나 보다. 어찌 되었든 어쭙잖게 시작한 커피가 지금은 유혹을 넘어 중독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으니 역설적으로 표현해 보면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여라 “ 쯤 이리라.


나는 커피의 도시 강릉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도 강릉은 지금 못지않게 커피숍이 많았었다.

일설(一說)로 커피숍을 차리느라 들어간 인테리어 값을 1년이면 다 갚을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릉의 커피숍들은 성업을 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도 가끔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커피숍에 가서 홀짝거릴 정도였으니 강릉 사람의 커피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다 할 수 있다.


예전 나는 중앙 시장 근처에 있는 “거리에서”라는 DJ가 있는 커피숍을 많이 갔었는데 요즘에 강릉에 내려가면 “테라로사” 경포점을 주로 간다. 내가 그곳을 주로 가는 이유는 단순히 .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 커피가 왠지 몇 년 전 필리핀에서 한 달 살기를 할 때 주로 마셨던 빵집의 커피와 비슷한 맛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한 데 이상하게 부드럽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커피를 모르는 사람의 주관적인 견해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가끔 들르는 곳이 있다면 바로 아버지가 추천해 주신 경포에 있는 1000원짜리 커피숍이다. 그곳은 커피 맛보다는 뷰(view)가 정말 멋진 곳이다. 게다가 싼 커피 값은 덤이다.

지난 주말에는 일주일치 장을 보러 마트에 들렀다가 원두 커피콩을 한 봉지 사 왔다. 원두 가루가 떨어질 때마다 동네 커피 집에서 100g씩 사서 먹곤 했는데, 지난 연휴 기간 동안 방문한 남양주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의 커피 추출 체험을 경험해 본 이후, 그동안 묵혀 놨던 수동 그라인더가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커피콩 2스푼, 그라인더로 갈기, 원두를 전체적으로 적신 후 잠시 기다려서 물을 천천히 부어 추출하기, 물의 양은 200ml 등등

체험을 했던 내용을 똑같이 흉내 내보려 정성을 기울이다 보니 꼭 바리스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추출된 커피를 예쁜 커피 잔에 옮겨 담고, 베란다에 있는 캠핑 의자에 앉으니 유명 커피숍이 부럽지 않다.

뭐.. 사실.. 유혹이라는 것이..

꼬드기기로 작정한 행위일진대... 무방비 상태인 나는 뭐..


오늘도 나는 일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버렸다... 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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