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도 색이 있다면, 그 색은 흑백일까? 최근 즐겨보기 시작한 드라마 속 회상씬은 모두 잿빛인데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알알이 유리공 속에 든 기억을 반짝거리게 유지하려면, 기쁨이(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캐릭터)가 그러하듯 자주자주 꺼내 닦아줘야만 하는 걸지도. 그렇게 번번이 상기하지 않는 기억이란 왜곡되고 혼탁해져 손쓰지 않으면 결국 까맣게 바래거나 깨져버리는 걸지도.
그래서 ‘요리’를 좋아한다. 삶의 큰 변곡점들만 흐릿하게 기억나는 와중에 색이 선명한 기억일랑 분명 '요리'와 함께였기 때문. 아니, 요리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에 색깔이 선명한 것일 수도 있겠다. 잘 익은 새빨간 수박을 커다란 주방칼로 덜컹 썰어내는 장면이라던가, 새하얗게 쌓인 얼음 알갱이 위로 새까맣게 얹어진 통팥 팥빙수의 기억. 시골집 앞 밭에서 따던 샛보란 가지와 그 물이 들어 온통 보라색이던 도시락통. 지글지글 끓고 있는 다홍색 김치찌개. 매미 소리 들으며 샛노랗게 익은 옥수수를 삶아 피리불던 기억들. 지금껏 내 모든 '요리 기억'의 색깔이 선명했던 것처럼 나의 아이 또한 쨍하게 선명한 요리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뭐든 흐릿한 세상에 뭐라도 선명한 것이 하나, 둘, 있으면 분명 그게 활력일터.
그렇게 색깔로 기억되는 요리 기억 중 하나가 바로 '오이김밥'이다. 널찍한 김 위에 심심한 밥을 펼치고 어슷하고 얇게 썰어 살짝 데친 꼬들한 오이를 간간하게 간해 얹은 후 둘둘둘 말면 끝. 김을 반으로 갈라 꼬마 김밥으로 만들면 도시락 안에 쫑쫑쫑 들어찬 모양새가 제법 정갈했다. 그리고 제법 '초록'이었다. 생으로 먹는 아삭한 오이 대신 데쳐서 물기 빼둔 오이는 그 꼬독한 식감이 또 제법이었다. 단무지가 없어도 느끼하지 않은 김밥. 단촛물 없이도 입 안에서 부서지는 맛이 시원한 김밥.
초록 알갱이가 콕콕 박힌 오이김밥이 도시락 속에 들어있던 날. 단조로운 초록의 모양새에 지켜보던 친구들은 뜨악했지만, 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굵은소금에 껍질 문질러 더러운 것들 씻어내고, 쓴맛 나는 오이 꼭지 다 자른 다음, 물기 자작한 오이씨도 발라내고, 얇게 썰어 뜨거운 물에 데치고 건져 찬물 샤워시키고, 또 손으로 꾹꾹 눌러 꼬독한 식감까지 만들어내는, 엄마의 수고 속에 들어있던 나를 위한 마음들. 알고 있었다. 쓴맛도 싫고, 물비린내도 싫어하는 내가 오이를 싫어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란 이유. 여름 내내 오이 반찬 끊이지 않도록 신물나게 상에 올리던 오이 좋아하던 엄마가 그 식성을 나에게도 물려주고 싶어했다는 것.
쌈장에 푹 찍어 생으로 먹으면 김치 못지않게 시원한 여름 오이. 그 쌩 맛을 아이도 알아주면 좋으련만, 오이는 냄새만 풍겨도 곧장 덜어내는 우리집 어린를 위해 엄마의 수고를 베껴와본다. 진동하는 오이향 대신 초록빛 쨍한 김밥을 기억하며, 오이를 싫어하지 않는 어른으로 커주기를 바라며. 씨 빼고 끓는 물에 데쳐 비린내를 줄인 <누구나 좋아하는 꼬마 오이김밥>, 상세레시피는 하단 새미네부엌 사이트 참고.
✅색깔로 기억하는 '오이김밥'
주재료
백오이 1개(200g)
밥 1공기(200g)
김밥용 김 2장(10g)
양념
요리에센스 연두순 2스푼(20g)
깨 1/2스푼(5g)
통참깨 참기름 1스푼(10g)
✅색깔로 기억하는 '오이김밥'
1. 세척한 오이는 씨를 제거하고 3~4cm 길이, 0.2~0.3cm 두께로 어슷 썬다. 썰어낸 오이는 끓는 물에 20초간 데친 후 찬물에 헹궈 손으로 꽉- 물기를 제거해 준비한다.
2. 볼에 오이를 넣고, 연두순, 깨, 참기름을 넣고 조물조물 섞는다.
3. 김 위에 따뜻한 밥을 얹고 양념한 오이를 넣어 돌돌 말아주면 완성!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