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를 도는 '서른'의 푸념
퇴근길 꽉 들어찬 지하철에 뛰어 들어 자리 앞에 섰습니다. 앉은 자리에는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한 명이 뭔가 자기들끼리만 재밌는 얘기를 하며 깔깔대고 있었습니다. 안 들리는 척, 무심한 얼굴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남학생 한 명이 내일은 집에 스터디한다고 ("구라치고") 하고 잠깐 바람이나 쏘이고 오자는 말을 합니다. 순간 혹 하는 표정을 짓는 여학생의 표정이 핸드폰 너머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내 또 다른 남학생은 "돈 없어. 그리고 내일은 인적성 준비해야 되잖아"라며 모락모락 피어난 분위기를 산산조각 내 버립니다. 잠시 동안 시무룩해진 세 사람은 열차 문이 열리면서 "내일 인적성 책 가져와"라는 말을 끝으로 '비극적'으로 헤어졌습니다. 그 작별의 모습이 돈도 없고, 취직 준비를 해야 하는 예전 저를 닮아 있었습니다.
이십 대 시절에 비한다면 지금의 저는 경제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카드 회사도 함께 말이죠) 밖에 나가서 1인분에 돈 만원 하는 메뉴판을 보고 여자친구 몰래 지갑을 슬쩍 열어보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제는 없어졌으니까요. 통장 잔고가 사이버머니처럼 현실성 없이 제로를 향해 달려갈지언정,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 살 돈이 없어 보던 책을 처음부터 다시 보는 씁쓸함 역시 이제는 사라졌습니다.
'뭐 먹고살지'라며 막연한 앞날에 대해 고민하는 빈도도 줄어들었습니다. 지금도 회사에서 내 책상을 빼면 어쩌나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염없이 자기소개서를 ctrl+c, v 하다 다른 회사 이름을 적고 좌절하는 일은 일단 사라졌습니다. 목표로 하고 있던 직업이 여의치 않아 사람을 뽑아만 준다면 어디든 이력서부터 넣는 스스로를 혐오하면서도 하루 종일 구인란을 들여다보고 있던 이율배반적인 인간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느끼는 '서른'은 '스물'에 비해 훨씬 더 팍팍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통장잔고나 경력은 이십 대의 저보다 지금이 나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멀찍이서 생활을 훑어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이죠. 저는 '스물'이 여전히 부럽습니다.
바늘구멍 같은 취업 경쟁률을 뚫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야 하는 요즘의 '스물'에게 부럽다는 건 오만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기에 따라선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 태평한 소리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죠. 인정합니다. 저 역시 이십 대 시절 서른 넘은 형들이 "바빠 죽겠다", "뭐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며 술잔을 털어 넣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잘난 척한다며 아니꼬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물' 시절에는 일을 벌리고, 취소하고, 뒷수습하는 모든 과정이 어느 정도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수업을 들어가지 않아도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심정으로 시험 기간에는 매번 밤새 벼락치기에 매달렸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할 것처럼 계획만 잔뜩 세워놓고, 정작 방학이 지나고 나면 온라인 게임 캐릭터 레벨만 '만렙'을 만들어 놓기도 했고요. 영어를 완전 정복하겠다고 열의를 불태우다가 정작 미드를 정복하는 사태도 있었습니다. 이십대 시절에는 그렇게, 하얗게 불태울듯 달리다가도 갑자기 팔도를 유랑하는 김삿갓처럼 허허거리며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할 수 있었습니다. 많든 적든, 어쨌든 내 의지로 시간 한 귀퉁이를 쑹덩 잘라내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제가 느끼는 '서른'은 다릅니다.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할 일이 많아집니다.
아침에 눈 뜨면 아빠를 찾는 아기가 제 앞에 있고, 제가 오길 기다리는 회사가 문을 열고 있습니다. 저녁에 조금 일찍 들어와서 아이와 놀아주길 바라는 아내가 제 옷을 매만지고 있고, 동시호가에 들어서며 오늘의 할 일을 던져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주식시장 호가창이 있습니다. 매주 새로 만나야 할 사람이 생기고, 만났던 사람들과 전화로, 메일로, 문자 메시지로 끊임없이 연락해야 할 일이 생깁니다. 점심 시간이 되면 문득 예전 친구들이 뭐하고 사는지 궁금해지고, 그럴 때면 여지 없이 그 녀석이 '카톡 청첩장'을 날리곤 합니다. 주말이 되면 이미 일과표를 작성해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모닝커피 한 잔 하기가 무섭게 운전대를 잡곤 합니다. 잠깐이라도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있을라치면, "또 자?"냐는 아내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들 녀석이 "아빠!"라고 외치며 배 위로 올라타고 있습니다.
물론 남들도 다 이렇게, 아니 저보다 더 열심히 들 살아가고 있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여유가 없는 것 같은 바쁜 날들을 나중에 돌아보면 '그때가 좋았지'라고 생각할 것 같기도 합니다. "바쁠 때가 좋은 거야"라는 어른들의 말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물'의 빈 공간,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고, 누구도 강제로 채워주지 않았던 '쉼표'가 그립고 부럽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제는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생활 속에서 잠깐의 짬조차 내기 어려운 상황을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제 모습이, 어딘가 기특하긴 하지만 못내 안타깝기 때문일 겁니다. 인공위성이 지구를 돌듯, 한시도 빼지 않고 제 갈 길을 가야 하는 '팔자'가 기구하다는 푸념 때문일 겁니다.
'서른'이 되면 자기만의 궤도가 생깁니다. 남들보기엔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내 나름대로는 헉헉대며 지내게 되는 하루 일과가 일 년 달력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주변을 보건대 그 궤도는 '스물'에 '빡세게' 살아야만 생기는 건 아닙니다. 궤적의 차이가 있을진 몰라도 나이가 차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일 돌아야 하는 건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그 궤도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지켜내야 할 내 삶이 되는 거겠죠.
그러니 아직 궤도에 오르기 전인 '스물'을 살고 있는 이들이 숨 쉴틈 없는 생활을 자초하는 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안 그러려고 발버둥을 쳐봐도 궤도에 오르게 되어 있는 '서른'인데, 이십 대의 어느 날에 내 스스로에게 작은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스물'은 얼마나 팍팍한지, 생각합니다. 모두들 그렇게 살아야 더 나은 인생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게 이십 대를 채찍질하여 '서른'의 궤도에 오른 사람은 뒤돌아 무엇을 그리워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꼭 그렇게까지 '스물'의 쉼표를 지웠어야 했나 싶은 겁니다. 마흔이 지나 쉰이 됐을 때 이 글을 보고 철 없는 내가 부끄러울지는 모르지만, 지금 '서른'의 한 가운데 선 저에게 '스물'은 평생 동안 되새기며 살며시 미소 지을 수 있는 '쉼표'가 심어져 있어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부치지 않아도 '서른'을 맞이하기에 요즘을 사는 대부분의 '스물'은 부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까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린 두 명의 남학생이야 어쩔 수 없다 치고, 종점까지 조용히 앉아서 영어 시험 참고서를 보고 있던 여학생에게 말해줄 걸 그랬습니다. 그냥 내일은 바람 쏘이러 가시라고, 돈 없이 땡볕에 땀 범벅으로 쏘다니더라도 그렇게 하시라고. 혹시 아나요. 내일의 '쉼표'가 방금 내린 저 둘 중에 한 명을 남편으로 만들어줄지. 그건 아마 인적성 수험서 몇 페이지 더 보는 것보다 훨씬 찬란한 일일 거에요. 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