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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Aug 06. 2015

롯데가(家)의 '핵노답' 촌극(寸劇)

'Giant'의 부활을 기대하며

IMF라는 단어가 질긴 저주처럼 느껴지던 1998년, 구조조정과 연이은 기업 붕괴 소식에도 아버지는 태평했습니다. 도리어 당신께서는 이번 달에 보너스가 나올 거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으스댔습니다. 아버지는 우리나라는 어렵지만 우리 회사는  끄떡없다고 했습니다. 경제에 대한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던 '고삐리'는 아버지가 또 허세를 부린다는 생각에 콧방귀를 뀌고 오랫동안 그 얘기를 잊었습니다.


아버지의 엄지 손가락이 다시 떠오른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왕자의 난' 혹은 '형제의 난'으로 불리며 연일 탑뉴스로 자리 잡고 있는 일가의 얘기가 제 기억을 강제로 소환한 거죠. 지금은 이미 퇴직하셨지만 제 아버지가 1998년 당시 다니던 회사는, 요즘 가장 핫한 기업인 롯데입니다.


아버지는 롯데그룹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몸이 편찮은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 두고 쉬는 동안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건 롯데 채용 덕분이었습니다. 경력직 입사 경위야 어찌됐건, 아버지 본인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들 모두에게 롯데그룹은 가뭄에 단비가 됐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부산 출신이었습니다. '부산 갈매기' 응원가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집에서 지겹도록 울려 퍼졌습니다. 심지어 아버지에게 혼났던 몇 안 되는 기억 중에는 이종범 선수가 좋아 해태 타이거즈를 응원한다고 했다가 아버지의 '버럭'을 들었던 장면이 있습니다. 92년도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 때는 오죽했을까요. 회사에서 받았다며 자질구레한 박스들을 들고 해맑은 얼굴만 겨우 내어 보인 채로 현관에 들어서던 '어린이'를 저는 또렷이 기억합니다.


92년 롯데자이언츠 우승 당시 모습. 이 순간 아버지 표정도 헹가래 받는 분 못잖았습니다. (출처 - 부산일보)


그 영향일 겁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롯데그룹을 유난히 살갑게 생각했고, 일본에 적을 둔 회사라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린 생각에 남들도 롯데가 일본에서 시작한 '반(半) 일본 회사'임을 나처럼 다 알 거라고 생각했죠. 심지어 대학을 다닐 때도 말이죠. 때문에 취업 준비를 하면서 몇몇 친구들이  "롯데가 일본 태생이라며?"라는 놀라움을 표현할 때는 그들보다 제가 더 놀랐습니다.


때문에 롯데그룹 '출생의 비밀'이 빅이슈로 떠오른 요즘이 개인적으로는 새삼스럽습니다. 하지만 TV 뉴스 인터뷰를 보니 롯데그룹이 '일본계 기업'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된 시민들이 꽤 있는 모양입니다. 집안 싸움으로 세간의 이목이 쏠린 결과로 롯데와 일본의 인연이 평상시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부각된 것이겠죠. 거기에 "한국에서 돈을 벌어다 일본에 갖다 바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고 해도 과하지 않았던 롯데그룹은 '무장 해제' 수준까지 이르면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리게 됐습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저는 롯데그룹에 대해 요즘 쏟아져 나오는 모든 팩트를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워낙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한꺼번에 나오는데다, 당국에서도 이제서 상세히 조사를 해보겠다고 할 만큼 아직도 정확한 사실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많기 때문입니다. (제 이해력이 부족한 게 물론 제일 크겠지만요) 다만, 사실 관계를 완벽히 파악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상황이 뭘 말하고 있는 건지는 분명하죠. 소위 '국민정서'라고 불리는 대한민국의 '아킬레스건'을 롯데는 건드리게 된 겁니다.

'완전히 한국인인 줄 알았던 신동빈 회장이 한국말 좀 하는 일본인처럼 인터뷰를 하고 있다니'

'그 형이라는 사람은 아예 한국말을 못 한다니'

'광윤산지 뭔지 하는 일본 소재 기업이 롯데그룹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열쇠라니'

'한국 롯데에서 번 돈이 일본 롯데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니'

사람들은 이미 생활 속에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롯데에게 뼈 아픈 배신감을 느껴버린  듯합니다.


관련된 기사를 자세히 보면 롯데 측에서도 열심히 반박을 하긴 합니다. 신동주, 신동빈 형제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긴 했지만 한국 국적이었다. 신동주 씨가 한국어를 거의 못 하긴 하지만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 인물이다. 한국 롯데에서 번 돈 중 일부가 일본롯데로 가는 건 사실이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등등.. 문제는 이런 해명이 지금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 시쳇말로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가 됐다는 겁니다. 이미 여론은 롯데그룹의 뿌리부터 비난하고 있습니다. ("팩트는 난 모르겠고") 다른 나라에, 그것도 무려 '일본'에 배당금이 새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롯데의 해명을 덮어버리기에 부족하지 않게 됐습니다. 거기에 겹쳐서, "롯데는 한국 기업입니다"라는 신동빈 회장 인터뷰는 바다 건너에도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일부 일본 네티즌들도 "왜 일본에 있느냐, 한국으로 가라"며 노골적인 반감을 내보이고 있다고 하니. 답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핵노답'이죠.

신동빈 롯데회장 /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 신동주 일본 롯데홀딩스 전 부회장, 이 세 부자의 인터뷰는 나오는 족족 국민들을 '아노미' 상태로 몰고 갔습니다. (출처 - 한국일보)


현재 롯데가 처한 상황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400개가 넘는 순환출자고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 유일한 대기업이라는 보도를 보면 재벌의 지배구조 문제가 올해 내내 제기되는 판국에 여태 뭘 했나 싶기도 하고요. 신격호 총괄회장이 "나는 신동빈을 후계자로 임명한 적 없다"며 판을 뒤집으려고 하는 걸 보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댄데 주식회사를 두고 무슨 욕을 먹으려고 저러나 싶기도 합니다. 일본에 적을 두고 있는 회사라 한국 법의 적용을 피해갈 수 있어 지분 구조나 의사 결정 과정 등을 '한국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약이 오를 정도니까요. 분명, 이번 사태로 불거진 문제들은 롯데그룹 내 '교통정리'가 마무리되고 나서 최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단순히 '처리'한다고 될 부분은 아니라고 봅니다. 롯데는 한국 기업이라고 하면서도 일본롯데 지분 비율에 따라 '결판'이 나게 생겼으니 한국인으로서 거부감을 갖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염증 반응이 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여태 한국인 '코스프레'를 했던 것처럼 일본 이름을 거론하며 너저분한 집안 다툼을 크게 만들어 생중계한 것, 그래서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것은 하루 이틀로 해결된 사안이 아닌 거죠. 몇 가지 팩트에 대한 소소한 정정 따위가 필요한 시점은 이미 지난 겁니다. 땅에 떨어진 이미지 쇄신을 위해 기약 없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한들, 롯데그룹이 누구에게 볼멘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기업의 뿌리 자체를 버릴 수도 없으니 고스란히 껴안은 채로 말이죠. 그렇게 해서라도 견뎌내고 다시 예전의 명성을 찾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야말로 '회복 불능' 상태에 빠져 롯데라는 기업의 이미지가 끝내 되살아나지 않는 최악의 상황,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의심스러울 정도니까요.


어릴 적부터 롯데의 그늘 속에서 자라 온 저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만, 롯데의 '백의종군'이 조금은 더 당당하고, 세련되고, 진실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요.

그래, 다 인정한다. 우리도 사람이라 진흙탕 싸움하게 된 거, 인간적으로 조금은 이해해다오. 무슨 욕을 해도 할 말이 없다. 대신 우리는 정말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에 새 뿌리를 내린 기업이라는 걸 몇 년이 걸리든 보여줄게 믿어봐.

아들만을 후계자 후보로 뒀던 남성적 기업 문화를 가진 만큼, 어떡해서든 사람들의 기억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인정하고 세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모습이었으면 합니다. 그게 몇 년이 걸리든, 몇 십 년이 걸리든. 일본에서 출발했다고 아베 마냥 얄팍한 말장난으로 약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메르켈처럼 끝없이 사죄하지만 비굴하진 않게 말이죠.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아직 이어지고 있는 진흙탕 싸움부터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주주총회의 표 대결을 끝으로 경영권 승계 문제는 이견 없이 빨리 매듭을 짓는 것이죠. 이미 벌어져 버린 싸움, 누가 봐도 이상한 급작스러운 화해보다는 명확하게 승부를 내고 봉합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과는 그 다음입니다. 간명하지만 또렷한 메시지를 담아 정중하게 국민들 앞에 서면 될 겁니다. 몇 번씩이나 머리를 조아리며 정수리에 카메라 플래시를 받다 끝내는 '요식행위'보다 해야 할 건, 사업적 측면에서의 비전이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기업으로서 롯데의 비전을 심도 있게 제시하는 부분일 겁니다.


98년 어느 겨울 날, 정말 보너스를 받아오신 아버지는 "이 맛에 롯데 다니지"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허세인 줄로만 알고 기대도 안 했던 우리 집 식구들은 그 날 저녁 삼겹살 몇 인분을 구워 먹으며 오랜만에 활짝 웃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 당시 롯데는 우리 아버지 등 뒤에 서있던 든든한 '거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실 만만찮습니다. 바깥에서 일어난 환란이 아닌, 집안에서부터 곪아 터진 우환인데다 위로하는 사람 찾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영업이익 좀 적게 나온 '생채기'와는 차원이 다르죠. 제 아무리 유통계의 거물이라도 내장부터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홀로 참아내기가 쉬울까,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기대해보려 합니다. 듬직한 등판을 숙인 채로, 겸허하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시민들의 비난을 받아들이는 'Giant'의 부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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