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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Ske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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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urquoise Aug 16. 2015

"그래도 꽤 멋진 하루였지?"

아저씨가 된 '그때 그 녀석들'에게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작은 펜션에는 이미 녀석들이 도착해 짐을 나르고 있었다. 나는 점심 때 즈음이면 도착할 거라며,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하면 청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툴툴거리던 것이 머쓱해졌다. 따가운 햇빛을 핑계 삼아 일부러 잔뜩 인상을 구기고 숙소로 들어 서봤지만 친구들은 왜 이렇게 늦었냐는 말 한 마디 없이 라면 끓일 건데 먹을 거냐고 물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이 방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차로 돌아가는 길에 손가락을 꼽아 봤다.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이 녀석들과 마지막으로 여행을 왔던 게. 군 복무들도 어찌저찌 다 마치고 각자 살 길을 찾기 시작할 무렵, 우이동 민박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풋내기들이 이제는 처자식을 다 데리고 자가용까지 끌고 모였다. 모여서 뭐 특별난 걸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술 안주 만드는데 하루를 다 써버리겠지만, 아무려면 어때. 그때 그 녀석들이 이렇게 다시 모이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날이었다.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아버지가 된 녀석, 그리고 가장 먼저 둘째 아들까지 데리고 나타난 녀석, A는 자기가 고기를 굽겠다고 나섰다. 그러면서도 A는 물놀이하느라 여념이 없는 첫째 아들이 못내 신경쓰이는 듯 자꾸만 수영장 쪽을 돌아봤다. 갓난쟁이 둘째 아들을 앞섶에 들쳐 메고 취사장으로 들어선 A에게 우리 모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기와 집게를 '세팅'해줬다. 여태 그래 왔듯이, 이번에도 A는 요리에 대해 실컷 아는 척을 하며 모두가 손사레를 칠 때까지 고기를 구워줄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A는 고기 집게를 손에 들기는커녕 구워진 고기를 입에 우겨 넣기에 급급했다. 아기띠에 매달린 둘째 아들은 자는  듯하다가도 기가 막힌 순간에 끄엥!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그때마다 A는 숙소로 다시 달려 가곤 했다. 그늘막 텐트에 둘째를 겨우 눕히고 팔을 좀 걷어 붙이려고 하니 물놀이가 끝난 첫째 아들이 새파란 입술을 해가지고는 아빠에게 다가왔다. 놀란 A는 첫째 손을 붙잡고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그 다음, 그리고 또 그 다음. '숯불지기'는 고사하고 자리에 붙어 있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던 A는 깊은 밤에 되어서야 잠시 해먹에 누워 담배를 물고 마누라에게 욕만 실컷 얻어 먹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녀석은 내가 그 말에 대꾸하기도 전에 "잔다"라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내 기억에 A는 분명, 손재주를 주체하지 못해 매번 새로운 레시피를 들고 나타나서는 밤새도록 요리를 했던 '셰프'였고, 술이 좀 들어갔다 싶으면 시시껄렁한 (거의 모든) 대화에서 '잘난 척'을 하며 취한 와중에도 논리적 대화를 원했던 '논객'이었다.


B는 우리 중 유일하게 딸 가진 아빠가 됐고, 젖병과 이유식을 모두 싸와야 했던 불운한(?) 놈이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B의 딸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붙임성 있는 모습을 보였고, '삼촌'들은 열광했다. 아들만 '드글드글'한 친구들 사이에서 녀석은 애교 넘치는 딸을 들었다 놨다 하며 (기분 탓이겠지만) 약간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딸바보'라는 게 실제로 이런 거구나 싶은 생각에 다들 '너 잘났다'며 웃고 떠들며 녀석의 너스레를 받아줬다.

문제는 B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한 방에서 자게 된 다음부터였다. 아들 녀석들보다 딸 아이가 예민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건지, B의 딸아이는 밤새도록 몇 번이고 깨어나서 엄마를 힘들게 만들었다. B의 바로 옆 자리에 누워 있던 나 역시 밤새 자는 듯 마는 듯, 새카만 공간을 찢고 나오는 아기 울음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나와 우리 가족이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하는 것만큼 신경이 쓰이던 것은 내 옆에서 분명 깨어 있음에도 '자는 척'하고 있는 B였다. 녀석은 아마도 우리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밤새 앉아 젖병을 물리고 있는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에 밤새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머릿속이 뒤엉켜버렸으리라. 일어나야 할지, 그냥 두고 봐야 할지, 고민이 묻어나도록 꼼지락대는 녀석에게서 깊은 한숨 소리가 잠깐 들렸다. 내 기억에 B는 분명, 술이 약해 매번 먼저 고꾸라져 잠이 들고 맨 마지막까지 숙취로 몸살을 앓는 '진상 고객님'이었다. 그토록 술을 마시고도 밤새도록 깨어 있을 수 있는 체질이 결코 아닌 녀석이었다.


남아 있던 음식으로 아침을 대충 때우고 각자 짐을 챙길 즈음, C는 구석에 벌렁 드러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얘길 들어보니 녀석은 동이 틀 무렵부터 일어나 취사장에 널려 있던 그릇을 깨끗이 닦고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까지 다 주워 놨다는 것이다. 아이들 짐을 찾고 챙기느라 엄청난 '소음'이 진동하는 방 안에서도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팔베개를 풀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서 먹고 또 자는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내 아이가 벗어 던졌다는 티셔츠의 행방을 쫓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C가 아침에 구석에서 잠깐 잠이 들어 있었던 걸 보았는지 물었다. 별 생각 없이 봤다고 말하는데, 아내는 C가 좀 외로웠던 거 아니냐며 말끝을 흐렸다. 듣고 보니 그랬다. 우리가 각자 아이들만 보고 있을 그 시점에서, C는 새삼스럽게 쓸쓸하다고 느꼈을 지 모르겠다. 다들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온 여행에서 녀석은 혼자였다. 찾아야 할 짐도 없었고, 챙겨야 할 가족도 자신 뿐이었기 때문에, 어제까지는 누구보다도 자유를 만끽하며 낄낄대던 녀석이 아침이 되자 '무대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늦은 나이까지 여러 가지 시험을 준비하다가 얼마 전에서야 회사에 취직하게 된 C에게 결혼은 아직 이르다고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제야, 녀석이 혹시 눈을 감고 있던 그 짧은 순간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내 기억에 C는 분명, 우리들 중 가장 진득하게 앉아 공부할 줄 아는 친구였고 누구보다도 아빠가 된 자기 모습을 기대했던 '낭만파'였다.


헤어지기 전 점심이나 먹자며 들른 초계탕 집에서, 우린 별  말없이 시큼한 국물을 떠다 먹었다. 어젯밤 들이 부은 알코올 기운 탓도 없진 않았겠지만, 사실은 아마 저마다 느낀 씁쓸함이 아직 다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몇 번 만난 적도 없는 아내들은 벌써 친해져서 단체 카톡방을 만들자며 연락처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각자 아이들을 들쳐 메고 초계탕 집을 나섰다. 후끈한 날씨 탓에,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아빠들은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자동차 시동을 걸어놨다. 아내들은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며 아이와 함께 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화장실 핑계를 대고 몰래 담배 한 개비를 태우느라 뒤늦게 주차장으로 나와 일일이 다시 '제수씨와 조카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운전석에 앉아 창 밖을 보니 떠나기가 아쉬운지 녀석들은 주섬주섬 담뱃갑을 챙겨 나무 그늘도 없는 뙤약볕 밑에 모였다. 나는 잠시 친구들을 바라봤다. 녀석들은 어제 나처럼 따가운 햇빛을 핑계 삼아 잔뜩 인상을 구기고 연기만 내뱉을 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먼저 간다, 조심해서들 가"
"그랴, 또 보게"

따가운 햇빛을 핑계 삼아 나 역시 표정을 잔뜩 구기고 운전석 창문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차창을 열고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다. 10년 전에 비하면 정말  재미없는 여행이 되어 버렸지만 너희가 모여 있는 걸 지금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그래서 오늘은 "그래도 꽤 멋진 하루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친구들에게 '낯 간지럽게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나는, 결국 흔해 빠진 작별 인사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나는 창문을 닫고 후진 기어를 넣었다.

녀석들은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그래, 뭐가 어찌됐든 멋진 하루였다"라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10년 전 우이동 버스정류장에서 쓸데없는 논쟁을 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우던 술 덜 깬 애송이들의 모습이 눈 앞을 스쳐갔다. 그때 '우리'의 모습이 그리웠다. 하지만 '멋진 하루'를 보내며 피곤에 절어버린 녀석들의 모습도 내겐 충분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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