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였던 시절을 기념하다
올해 그 날은 그냥 평일이었다. 달력엔 음력 날짜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휴가에서 복귀한 나에겐 밀린 일을 서둘러 처리해야 할 바쁜 날이었다. 이번 달 카드값을 내라며 이메일이 날아온 날이었고, 아내가 사이버머니처럼 사라져버릴 한 달 치 생활비를 보며 한숨을 쉰 날이었다. 비가 와서 담배 한 개비 피우러 나가기도 귀찮은 어두침침한, 그렇게 너무나 평범한 날이었다. 그런 모래알 같은 하루 동안에 나는 너를 생각했다.
처음 그 날을 맞이했을 때 너와 나는 용산전자상가를 헤매고 있었다. 방학 내내 했던 내 생애 첫 아르바이트에서 받은 20여 만원으로 네 생일 선물을 사주겠다고 한 날이었다. 너는 CD 플레이어가 갖고 싶다고 했고, 학창 시절 용산에서 발품 깨나 팔아본 나는 '나만 믿어'라며 낯선 곳에서 말수가 줄어든 널 데리고 다녔다. 그 땡볕 아래서 몇 시간을 돌아다니고 나서 너와 나는 계획에도 없이 비싼 CD 플레이어를 들고 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비를 거의 다 쓰다시피 했지만 빳빳한 박스를 손에 들고서야 눈웃음을 치던 네 모습에 나는 행복했다.
두 번째 그날에 너와 나는 아마 함께 화실에 있었을 것 같다. '있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건 지나온 시간이 길어 기억에 얼룩이 졌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하고 싶은 디자인 공부를 한답시고 손에 물감깨나 묻히고 다녔었고, 너는 필요도 없는 그림 공부를 나 때문에 같이 하고 있었다. 마음만은 이미 예술가였던 내 친한 친구 녀석 하나와 우리는 여름 내내 셋이서 목동역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화실로 향했다. 모르긴 해도 두 번째 그날 너와 나는, 홍대 앞 화방에서 함께 골랐던 화구통을 들고 흔들면서 늦게까지 함께였을 것이다.
너와 나의 마지막 그 날은 의외로 조용했다. 내 친구들 무리와 한창 친해져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모였지만, 그 날만큼은 다 같이 모이지 않았다. 기숙사에 있던 너를 만나러 나는 수원으로 내려갔고, 너는 여태 못 봤던 영화를 보자며 늦은 밤 나와 함께 <물랑루즈>를 봤다. 그러곤 인적 드문 새벽 영통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입에 물고 너와 나는 서성였다.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나와 4학년 졸업반이 현실이 되어가는 너는 거리를 뒤덮은 어둠이 마치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내 친구들 연애사에 대해 심각히 대신 고민해주는 오지랖을 아침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회사 후배들에게 잔소리한 게 못내 미안해 간단히 저녁을 사주고 조금 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락가락하는 비 탓인지, 그날 따라 홍콩 지하철과 비슷한 냄새가 나던 객차 안에서 나는 손가락을 꼽아봤다. 열, 열 하나, 열둘. 12년이나 지났다. 너와 내가 만났던 기간보다 네 배 정도 긴 시간이 흘렀다. 목동역 화실에도, 영통 길거리에도 12년 동안 가지 않았다. 너와 내가 세 번 함께 있었던 그 날들을 축하해줬던 친구들 소식도 몇몇은 가물가물하다. 나는 눈 밑에 주름이 한 가닥 생겼고, 나보다 잘 생긴 아들 녀석의 아빠가 되었다. 요즘은 가끔 쉬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그거'라고 표현하는 일이 잦아졌고, 나이에 맞지 않게 비가 오는 날에는 무릎이 뻣뻣하기도 하다. 그리고, 많은 기억들이 지워졌다. 지워져 가고 있다.
너에게 오늘은 어떤 날이었는지 궁금하다. 파란 눈의 남편을 만났다는 얘기만 흘러 들었는데, 그 쪽에서는 그 날도 '쿨하게' 챙겨주는지 모르겠다. 이제 너와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니 어쩌면 그 날이 뭐 그렇게 중요한 거냐며 나처럼 그냥 바쁜 평일로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
아니, 사실은 이런 시시껄렁한 게 궁금한 게 아니다. 혹시 매년 그 날이 되면 너는 가끔 기억하는지, 요즘은 통 찾아보기 힘든 그 CD 플레이어를 떠올리는지, 화구통을 들고 함께 였던 그 날을 추억하는지, 영통 길거리에서 맞이한 아침 해가 유난히 눈부셨던 것도 여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벚꽃을 보면 너와 내가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했던 약속을 떠올리는지, 가끔 신경질이 날 때면 영화 촬영을 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타퉜던 너와 나를 기억하는지, 함께했던 그 날들에 너와 내가 얼마나 재밌고, 행복했고, 영원할 것 같았는지를 여태 품고 있는지 궁금하다.
12년 동안 나는, 너와 내가 '우리'였을 때 소중했던 날과 이제는 의미 없는 숫자와 모든게 처음이던 서로의 모습들을 하나도 버리지 못한 채 여전히 품고 다닌다. 너마저 잊었다면 세상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기억을, 나는 어쩐지 아저씨가 되고, 아내의 남편이 되고, 아들의 아버지가 된 오늘도 버리기가 힘들다. 잊어야 한다면 잊혀 지면 좋겠다는 노랫 가사가 그저 통기타 선율에 얹기 위한 말이 아니었음을, 나는 알게 됐다. 그게 지금 내 생활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너무나 죄스러워, 나는 과거가 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올해 그 날은 그냥 평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늦은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네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기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