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을 바꾸는 묘수, 혹은 느슨한 완착
'페이 전쟁'이라는 말이 요즘 뜨겁습니다.
간편 결제 시장을 두고 애플, 구글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마치 이때쯤 내놓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페이'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글로벌 IT 기업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내로라하는 업체들이 앞다퉈 간편 결제 시장에 뛰어들고 있죠.
눈 뜨고 나면 종류가 늘어나 있고 다들 자기네 간편 결제가 최고라며 마케팅을 해대니, 어떤 걸 선택해야 할지 쉽게 갈피를 못 잡는 소비자들도 꽤 많을 것 같습니다. (저처럼 말이죠)
이런 와중에 이번 달 15일부터 삼성이 '삼성페이' 체험단을 운영한다고 밝혔습니다.
'삼성'이라는 타이틀만 본다면 '페이 전쟁'에 참전한 타이밍이 약간 늦은 감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세계 시장을 겨냥할 수 있는 국내 '끝판왕'의 등판으로 글로벌 간편 결제 시장 자체가 달아오를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시장 전문가들은 '삼성페이'의 출격을 앞두고 이미 애플페이, 안드로이드페이와 비교·분석 자료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확실한 성공이다, 혹은 희대의 망작이다 같은 극단적인 평가보다는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꽤 균형이 잡힌 컨센서스가 만들어진 것 같은데요.
그런 팩트와 분석 속에서, 몇 가지 재미있는 지점이 보여 약간의 '소설(?)'을 가미해 살펴보려 합니다.
9월 중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인 삼성페이는 그 시점 자체가 중요한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올해 3분기는 애플이 '페이'를 개시한지 약 1년이 되는 시점인데다 안드로이드페이가 북미 지역에 서비스를 갓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애플페이가 서비스 도입 후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안드로이드페이와 약간의 시간차가 예상되는 삼성페이는 어떤 마케팅으로 승부를 띄우면 좋을지, 삼성페이는 상대방 패를 미리 보고 약간이나마 대처할 수 있는 어드밴티지를 얻게 된 것이죠. 물론, 시장을 선점해야 소비자 기억의 사다리 맨 위에 오를 수 있다는 마케팅 전략의 기본을 고려한다면 출시일이 비교적 늦은 부분이 핸디캡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무리하게 일정을 앞당겨 '부실공사'를 자초하는 것보다 라이벌의 공세에 대응하면서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는 것이 삼성에게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9월 이후 발표될 삼성의 스마트폰 신제품 라인업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삼성페이가 갤럭시 S6이후 기종에서 통용될 거라는 얘기는 향후 시장에 내놓을 신제품 판매와 삼성페이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가짐을 시사하고 있죠. 대표적인 신작으로 거론되는 갤럭시 노트 5도 9월 출시에 무게가 실리고 있고, 가장 골치 아픈 경쟁폰인 아이폰 6S도 9월 출시설이 유력합니다. 즉, '9월 스마트폰 대전'에서 삼성은 삼성페이를 첨병으로 내세워 명예회복을 노릴 수 있는 포지션을 잡은 것이죠.
물론 이 역시 삼성 측의 속내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당 부분 '소설'일 수 있겠습니다만, 몇 분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영업이익을 내던 IM 부문이 최근에는 반도체에 자리를 내어준 것을 감안한다면 스마트폰의 권토중래를 노리는 삼성이 특별한 이유 없이 9월을 삼성페이의 출발점으로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간편 결제시장만 놓고 보나, 스마트폰 라인업을 생각해보나, 삼성페이가 9월에 있을 IT 공룡 '슈퍼매치'의 히어로로 이미 선정됐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IT업계 성수기로 불리는 4분기를 기약하는 의미도 빼놓을 수 없겠고요.
많은 전문가들이 이 부분을 삼성페이의 가장 핫한 점이라고 말합니다. 삼성 측에서도 마그네틱 방식을 삼성페이의 차별성이라 내세우고 있고, 저 역시 MST가 삼성페이의 정체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MST방식과 NFC 방식을 동시에 구축하기로 한 결정은 아마 서비스 개시 시점이 타 경쟁사보다 늦은 이유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플이나 구글처럼 NFC 방식으로만 구동할 수 있는 '페이'를 만드는 건 '하드웨어의 삼성'에게 전혀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미 갤럭시 시리즈는 NFC 분야에서 애플의 아이폰보다 앞서 있었고,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제조사에 따라 NFC 활용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구글에 비해서도 삼성은 '전술적 우위'가 명확하니까요. 그럼에도 삼성이 굳이 루프페이를 인수하고 마그네틱 방식까지 도입한 것은,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 시장 장악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 맞습니다. 이미 전 세계에서 엄청난 수요를 자랑하는 단말기를 그대로 쓰면 되기 때문에 NFC 장비를 보급해야 하는 애플과 구글에 비해 단박에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뿐일까요?
삼성페이가 겨냥하고 있는 대상이 과연 애플과 구글 같은 경쟁사뿐이겠느냐 하는 것이죠. 저는 삼성페이가 기존 플라스틱 카드에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한 최초의 핀테크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MST 방식을 채용한 삼성페이는, 애플 등의 경쟁사들이 플라스틱 카드의 '대안'으로 '페이'를 말하는 것과 달리 플라스틱 카드보다 적은 액션으로 같은 효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대안'이 아닌 '신종 화폐' 기능으로 '페이'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존 핀테크 업체들이 내세운 개념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죠. 마그네틱 단말기에 '긁지 않고' 갖다 대기만 하는 방식을 M&A을 통해 확보한 삼성. 저는 삼성페이가 경쟁 IT업체가 아닌 기존 플라스틱 화폐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고 삼성페이의 왕국, 즉 새로운 플랫폼으로 받돋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앱 카드든 뭐든 해봤지만 자사 플라스틱 카드도 모바일로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는 국내 카드사 사례를 본다면, 삼성은 그야말로 대단한 자신감으로 페이 사업을 진행해왔구나 싶습니다.
삼성은 현재 기 발표된 '페이' 서비스들과 마찬가지로 삼성페이가 카드사로부터 받는 수수료를 책정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세계적 추세를 봐도 간편 결제 시장 초기 국면이기 때문에 많은 페이 업체들은 수수료 수익을 챙기는 것 보다 M/S 확보, 즉, 이용자 수를 늘리는 전략이 유효하다고 보는 상황입니다. ('통뼈' 애플을 제외하곤 말이죠) 비슷한 사례를 가까이서 찾아보자면,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콜택시 서비스와 비슷하게 수익보다 '파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인 거죠.
자, 그럼 삼성이 수익을 포기하고 노리는 것이 M/S 뿐이냐.
많은 전문가들은 삼성페이가 '이용자 습관'을 점령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용자가 많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충성도' 높은 이용자 층을 두텁게 만들어보겠다는 목표인 것이죠. 아이폰을 이용하던 소비자가 안드로이드로 갈아타길 망설이는 현상처럼, 삼성페이에 결제 정보를 '애써' 담아둔 사용자들이 다른 페이 서비스로 유출되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삼성 스마트폰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는 '해자'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략은 비단 스마트폰에서 그치지 않을 겁니다. 애플, 구글, 네이버, 다음카카오 등 다른 페이 서비스 업체와 다르게 삼성은 전통의 제조업 강잡니다. 경쟁 IT 업체들이 '페이 서비스'를 기존 플랫폼에서 진화한 또 하나의 애플리케이션처럼 개념을 잡고 있습니다만, 삼성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iOS나 안드로이드 같은 '플랫폼'이 없는 삼성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생태계' 안에 이용자를 붙잡고 싶어도 잡아둘 바운더리가 사실상 보이지 않는 것이죠. (삼성 제품 사용을 플랫폼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때문에 삼성페이는 삼성이 하드웨어 제조업체로서 새롭게 구축하려고 하는 신종 '플랫폼'의 첨병 역할을 부여받은 의미가 강합니다. 가깝게는 스마트워치로 시작되고 있는 웨어러블 기기, TV를 비롯하여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물인터넷 등 삼성이 '맹위'를 떨칠 수 있는 미래 먹거리에 삼성페이 서비스를 연동하려는 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삼성페이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인 소비자라면, 삼성의 새로운 제품에 삼성페이가 적용될 경우 자연스럽게 그 제품을 구매할 가능성도 높아지겠죠. 삼성은, '삼성페이'를 필두로 삼성 제품이 하나로 묶인 '삼성 IT·가전 제국'을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합니다.
삼성페이가 시장에 선을 보였을 때, 그것이 얼만큼의 파장을 몰고 올진 실제로 진행이 되어 본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만.
본격 개시 이전까지 삼성페이에 대해 드러난 정보만 놓고 '소설'을 써보면, 삼성페이는 단순히 경쟁업체를 따라 급박한 심정으로 내놓은 미봉책이라기보다는 "판을 한 번 뒤집어보자"는 노림을 품고 등장할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이 점쳐집니다.
다만, 그 모든 목표와 시나리오는 디테일한 부분까지 타사 대비 압도적일 때 실현될 수 있겠죠. 이를테면 (앞서도 잠시 언급했다시피) 플라스틱 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이 '애써' 삼성페이를 이용해야 할 이유를 삼성 측은 고민해야 할 것이고, 안드로이드페이와 어쩔 수 없이 소비자 층을 나눠 먹어야 하는 한계도 극복해야 합니다. 루프페이를 인수하면서까지 뒤늦게 시장에 뛰어든 만큼 마케팅 측면에서 입은 잠정적 손실을 마그네틱 방식이라는 차별성으로 충당해야 하는 부담도 있고, 마그네틱 방식이 점차 IC카드 방식이나 NFC 방식으로 대체되고 있는 시류도 감안해야겠죠. (삼성페이는 NFC도 지원한다고 하지만 경쟁사 '페이' 서비스와 비교 우위를 갖고 있는 마그네틱 방식에서 별 성과 없이 물러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손실이죠)
"바둑기사는 모든 수에 최선을 다하여 의미를 부여한다"
(토씨가 좀 틀릴지는 모르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바둑 프로기사 조훈현 씨가 최근 인터뷰 중에 한 말입니다.
삼성이 바둑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만(^^;) 삼성이 시장에 던질 '삼성페이'라는 '한 수'도 의미 없이 남들을 따라가기 위해 내놓은 것은 절대로 아닐 거라 확신합니다. 충분히 고민했고, 삼성의 미래를 위한 중책을 짊어진 한 수를 시장 중앙에 내려놓겠죠.
이 선택이 삼성의 바람대로 '판'을 뒤집을 묘수가 될지, 한 발 늦은 '완착'이 될지는 지금부터 삼성이 취할 전략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나온 눈에 따라 말을 움직이는 선택은 삼성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