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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크티 Aug 22. 2016

개인의 재난에 대처하는 집단의 자세

영화 <터널>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

터널 2016.08.10 개봉
감독 김성훈
출연 하정우(정수), 배두나(세현), 오달수(대경)

세월호 이야기다. 하지만 감독은 세월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극본은 세월호 이전에 완성됐다. 감독은 말한다. 세월호 이전에 이 영화가 나왔으면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사건과 비교됐을 거라고. 그렇다. 세월호에서 나타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은 처음 드러난 게 아니었다. 관행으로 여겨지는 불법행위는 그 이전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그 환부를 한 번도 제대로 도려내지 못했고 관행이라는 관성이 계속 국가적 재난을 만들어왔다.     



영화는 기자들과 정부 관료들을 철저히 부정의한 집단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논할 필요가 없다. 정의와 부정의의 극명한 대비를 위한 영화적 장치들에 불과하다. 혹은 약간의 풍자를 위한 과장일 뿐이다.   

 

영화는 생명과 경제적 가치를 등가로 치환해버리는 우리 사회 모습에 대해 비판한다. 수십억 원의 돈을 들여 터널 속에 갇힌 한 명을 구한다. 그 한 명을 구하다가 또 다른 이가 목숨을 잃는다. 제설 장비 지원에 있어서도 터널 속 한 명보다는 도로 위 수백 명의 안전이 우선시된다. 이 지점에서 항상 영화는 양적 공리주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행복은 희생되어야 하는 것인가.    


사회 계약론자들은 인간은 혼자일 때보다 집단을 형성했을 때 더 많은 이익이 있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개인은 집단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정수(하정우)가 터널 속에 갇혀있을 때 도덕적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여러 번 발생한다. 그때의 개인은 항상 선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선한 개인들이 모여 구성한 사회의 목소리는 달랐다. 그 집단의 목소리는 굉장히 이기적이면서 합리적이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기 전에, 더 많은 비용이 들기 전에 한 명의 생명을 포기하자고 말한다.    


공리주의에 입각해 고민해본다. 한 명과 여러 명의 생명, 한 명과 수백억 원의 비용. 단순히 비교해보면 그 한 명을 포기하는 게 옳다. 하지만 경제적 계산에 의해 한 명의 생명이 희생됨으로써 이타심이라는 더 큰 가치를 잃는다. 우리 사회는 여태껏 그 큰 가치를 망각해왔기에 같은 사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진짜 공리를 위한 일이 무엇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한 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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