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공부를 시작하고는 줄곧 생리통이 심했는데 최근에는 ‘심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고통이 지속됐다. 진통제 8알을 이틀 만에 다 먹고 나서야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사회적 편견이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산부인과는 어색한 곳이고 검사를 받는 것 역시 조금 불편했다. 키를 조금 올리고 몸무게를 조금 줄인 검진표를 내고 검사 후 작은 간이의자에 앉아 원장님을 마주보았다.
이정도면 고통이 꽤 심했을 텐데 왜 이제야 왔어요.
나는 그렇게, 큰 대학병원으로 가서 수술날짜를 잡았다. 여성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 난소근종이었다. 다만 내 혹은 매우 컸기에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술은 나에게도 우리 가족에게도 너무나 낯선 것이어서 입원에 필요한 목록을 빨간펜을 그어가며 부지런히 챙겼다. 또한 10시 수술을 잡았다는 말을 10시까지 오라는 말로 알아들은 나는 9시 반쯤, 병원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수면마취는 익히 듣던 대로였다. 내 입에 마스크가 씌워졌고 ‘알콜 냄새 같....’ 하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땐 나는 회복실에 홀로 누워있었다. 마취가 덜 풀린 알딸딸한 정신으로 ‘추워 추워’를 연신 입 안에서 굴렸다.
아마 5분 뒤쯤, 누군가를 부를 힘도 의지도 없는 몸이 병실의 천장을 꿈뻑꿈뻑 보고 있는 것을 간호사가 알아차려주었고 침대에 누워있는 그대로 내가 입원할 병실로 옮겨졌다.
회복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특히 물을 마실 수 없는 고통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영화 ‘터널’에서 수십일 동안 물 없이 생존했던 하정우는 영화적 픽션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가만히 누워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얀색 병원 침대가 하얀 대리석으로 느껴졌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불편해졌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은데 또 몸은 그 조금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모든 아픔을 뇌로 전했다.
내가 입원한 곳이 산부인과였던 터라 분만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오롯이 지켜볼 수 있었다. 내 옆에는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은 산모가 입원을 했는데 그녀가 밤새 앓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그리고 나는 절대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혹을 떼는 수술도 너무나 고통스러운데 아기를 떼어내는 수술은 나 같은 겁쟁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나긴 5일의 입원이 끝났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3개월 뒤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이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진 이유는 그때의 아픔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기는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할 정도로 고통에 온건해졌다.
생각해보면 이별도 그랬다. 숨을 마실 땐 으레 눈물이 삼켜지고 숨을 뱉을 땐 울음이 뱉어지던 그 이별. 당시에 아픔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픔은 견뎌졌고, 잊혀졌다. 나는 사랑하고 상처받는 일을 반복했다.
망각이라는 것은 사람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물리적 현상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주신다.’라던가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들은 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믿음 덕분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지나보면 뭐든 별 것 아니다. 중간고사에 세상이 무너지던 중학생이 수능에 무너지던 수험생이 취업에 무너지는 취준생이. 그렇게 계속 무너지는 삶을 살테지만, 점점 더 큰 실패를 경험할테지만 그 고통의 순간이 내 평생을 망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저 모른 척, 잊은 척.
그렇게 살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