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도 없이 단축수업을 한 날,
초등학교 3학년의 나는 통통 걸으며 또 신발주머니를 흔들며 교문을 나섰다.
그러다 분식점 앞에서 멈칫. 떡볶이를 사 먹을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용돈을 아껴보기로 했다.
“엄마 나 오늘 학교 일찍 마쳤어” 현관문을 신나게 열었다. 신발을 던지다시피 벗고는 기척 없는 엄마 방문으로 달려갔다.
나는 내 몸통만큼 큰 여행가방에 옷을 대충 구겨 넣고 있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얼른 달려가 가방의 열린 틈을 온몸으로 막았다. 가방 위에 쓰러진 내 몸을 엄마가 울면서 껴안았다.
바로 어젯밤, 엄마와 아빠가 크게 싸움을 했었다. 10년을 넘게 잘 살아온 부부가 새삼스럽게 “더 이상은 같이 못살겠다”라고 말한 터였다. 나는 방에서 울다 지쳐 잠들어버려 그 싸움이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알지 못했는데 그 결론을 지금 보게 된 것이었다.
엄마는 며칠만 여행을 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 대사를 어디선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결말까지.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울었다. 엄마의 울음을 모두 삼켜버릴 만큼 크게 울었다. 엄마가 나를 보고 마음이 약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성공이었다. 엄마는 미안하다며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그날, 단축수업을 안 했다면 엄마를 놓쳤을까? 아니면 엄마 혼자 짐을 싸다가 다시 풀어버리고 하교시간쯤 나를 반갑게 맞아줬을까?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아마 후자였을 거다. 내가 떡볶이를 사 먹고 느지막이 들어갔어도 엄마는 집에 있었을 거다. 단축수업을 해서 엄마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학교가 괜히 단축수업을 해버려서 엄마와 아픈 추억을 남기게 된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는 또 엄마와 아빠가 크게 싸웠다. 그때는 “같이 못살겠다”가 아니라 “이혼하자”라는 현실적인 단어가 등장했다. 조금 더 강한 의지의 단어였다. 당시의 싸움은 일방적인 아빠의 분노였고 나는 그 분노의 대상이 엄마가 되었다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오히려 엄마에게 가방을 쥐어줬다. 이혼 서류를 내가 떼어주겠다고 말했다.
실패했다. 엄마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결국,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