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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r 22. 2023

가만히 있어서 도움 되는 아이들

우린 어떤 역할의 옷을 입었나

우리가 입는 ‘역할의 옷'은 다르다. 공동체 안에서도 누군가는 수시로 옷을 바꿔 입지만 다른 누군가는 한번 입은 옷을 쉽게 벗지 못한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의 옷을 입고 있을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가장 벗기 힘든 옷을 입은 이는 누구일까? 우리 공동체는 돌보는 존재에게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오랜 시간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은 희생을 담보한 돌봄을 강요 받아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뒤따르는 걸 미덕이라 강요받은 이들은 여성, 혹은 엄마라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들의 돌봄은 노동의 가치로 환산되지 못하고 자주 ‘중요한 일'에서 제외됐다.


"얘들아, 집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엄마요."

"우린 아빠요."

"우린, 할머니요."

대다수 아이가 여전히 가사노동의 중심에서 엄마를 외쳤다. 아빠가 가사노동에 참여한다고 말한 한두 명 아이의 대답이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요즘은 이혼이나 다문화등 가정 상황이 다양해진 만큼 할머니가  돌봄의 주체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역시 오랜 시간 가사노동의 중심에 있던 여성이란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 너희는 집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어? "

  아이들은 조금 자신 없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저도 집안일을 돕고 싶은데요, 엄마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래요!"

 "앗, 우리 엄마도 그러는데?"

 "나도!"

 "나도! 너희 엄마도 그래?"


아이들은 마치 같은 엄마와 사는 아이들처럼 똑같이 외쳤다. 나 역시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라며 돕겠다는 아이의 호의를 단칼에 무찌른 경험이 있다.


  가만히 있어서 도움이 되는 존재!


다시 새겨보니 참 무서운 말이었다. 내 아이가 가만히 있는 수동적 존재가 되는 것, 그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존재라니! 어느 부모나 자녀가 건강히 자립하길 바랄 것이다. 그러려면 아이는 공감하는 구성원으로, 자기 몫의 일을 찾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여전히 우리 사회의 돌봄은 가족 중 어느 한 사람, 특히 여성의 희생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 ‘작은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가정의 ‘역할 분담’은 아이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일상 중 무엇하나 그냥 되는 것이 있는가? 자신이 먹고 입고 치우는 문제 정도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가르쳐 줘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있어서 도움이 되는 존재'로 우리 아이를 키우지 않아야 할 이유다.


 여성(엄마)의 ‘돌봄’은 오랜 역사 속에서 꾸준히 진화해 왔다. 이런 차별에도 불구하고, 돌봄 받은 수많은 존재를 키우고 일으켜 세웠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진실로 남았다.

 

 아이들이 ‘아주 중요한 일’과 ‘하찮게 여겨진 돌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길 바란다. 자신과 이어진 관계에 ‘공감’하는 마음은 ‘자기 정체성’을 찾는 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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