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작은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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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행을 결정할 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아이들이 다닐 학교였다. 제주시 학교는 도시 학교 못지않은 과밀 학급과 경쟁도 치열하단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알아보던 곳은 '제주도 작은 학교'에 대한 정보였는데 도시에서 생각하기엔 무척 비현실적이었다.
특히, 방과 후 활동에 대한 정보는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골프, 승마, 가야금 같은 수업으로 구성돼 있었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거나 매달 만원 정도 수업료 납부가 전부였다. 어떤 학교는 골프가 정규 체육 수업에 포함돼 있기도 했고 어느 기사에선 신입생이 말을 타고 입학식장에 입장했다고 해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작은 학교 아이들 간의 끈끈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처음엔 이런 이유에 대해 친구와 6년을 같은 반에서 지내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친구가 제한 적일 수밖에 없으니 문제가 생기면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화해를 하고 함께 놀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더 있었다. 마을에는 아이의 부모부터 조부모까지 3대 이상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같은 초등학교 동문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따지고 보면 사돈의 팔촌 관계로 얽혀 있고 서로의 조상 제사에 오고 가는 관계였다. 할아버지의 어릴 때 별명(예를 들어 '찐 감자')으로 손주를 부르는 일도 단짝 친구 아버지들도 초등학교 단짝이던 경우는 작은 마을에선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요즘,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를 준비하고 제주로 오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덕분에 작은 학교가 활성화되는 점을 반기면서도 전에 없이 소란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이주 학부모 중엔 아이 간의 작은 다툼에도 ‘학교폭력위원회 소집'을 요구하며 교장실로 찾아가 큰소리를 내는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당연히 따질만한 일은 따져야 할 테지만 작은 마을의 생태를 먼저 이해하려는 자세도 중요해 보였다. 작은 일에도 아이 대신 싸워주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한다기보다 아이를 믿지 못하는 부모일 수 있었다.
또한 제주도는 관광지지만 저변에 역사적인 슬픔이 담긴 곳이다. 작은 학교정문마다 4.3 희생자의 무덤과 묘비를 쉽게 볼 수 있고 관광지로만 생각해 걷는 길이 과거 학살터이기도 했다. 해마다 4월엔 한집 건너 한집씩 제사가 있었고, 제주도 이웃끼리는 제사에 서로 소주를 나누는 게 흔한 인사였다. 그저 과거에 지나간 일이 아니라 현재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엄연한 역사적 현실의 장소였다.
제주도에서 잠깐 살아 볼 계획이 있거나 이주해 이곳에서 자녀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가장 먼저 제주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제주 토박이'라 불리는 이들이 겪은 일을 미리 알고 참고한다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답을 얻을 수도 있었다.
아이들 학교에는 '안전지킴이 선생님'이 계셨다. 아이들 눈에는 할아버지였는데 선생님도 그 학교 30회 졸업생이셨으니 아이들에겐 선배님이기도 했다. 등굣길 차량 안전지도를 하면서 아이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반갑게 맞아주고 방과 후에 운동장에 혼자 남아있는 아이와 축구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곤 했다.
어느 날, 학교 앞을 지나다 우연히 아이와 축구하고 계신 모습을 보게 됐다. 아이와 서로 공을 뺐으며 축구하는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가 골을 찰 순서가 되자 선생님은 갑자기 미니 골대를 번쩍 들고 공을 쫓아 달려가시는 것 아니겠는가? 아이는 백발백중 골인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는지 알 수없지만 그 모습만으로 더 이상 아무 바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한 명의 좋은 어른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 향이 엄청난 것임을 배운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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