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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쫓기듯 바쁘게 사는 것도 여유 없는 사람끼리 괜한 경쟁 하는 것도 싫었고 수시로 불안해지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낼 거냐 말 거냐 고민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해 놀 수 있는 곳이면 더 바랄 게 없었다. 한적한 시골의 단조로운 일상을 동경하곤 했었다. 진짜 시골마을의 생태를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조용한 마을에 살게 된 것은 일단 성공 적였다. 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종종 귀에서 이명이 들릴 정도로 극강의 음소거 상태였으니까. 저녁 7시만 돼도 마을 안에 영업하는 가게라곤 없기 때문에 밤은 유독 깜깜했다. 사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은 기대해본 적 없던 선물 같은 것이었다.
집에서 나와 3분만 걸으면 산호색 예쁜 바다가 있었다. 나는 유독 이 골목을 좋아했다. 골목의 묘하게 꺾인 구조 때문일 텐데, 골목에 들어서 몇 걸음 걷는 동안은 낮은 밭담의 소박한 풍경이 다정하게 말을 거는 정겨운 골목이었다. 여기 까진 근처에 바다가 있을걸 상상할 수 없지만 골목을 빠져나가는 출구즈음에선 믿기 어려울 만큼 예쁜 산호색 바다가 갑자기 눈앞에 펼쳐졌다. "짠~! 놀랬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로도 난 수없이 골목을 오갔지만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서 항상 감탄했다. 그 길에 다다르면 마치 장막을 걷고 이 세계에서 저편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동네 친구 여럿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바닷가에 나가 모래 놀이를 하며 종일 놀았다. 어쩌면 저토록 잘 놀 수가 있을까? 마치 그동안 제대로 놀지 못한 것까지 찾아 놀겠다는 듯 아이들은 뛰고 또 뛰놀았다. 가끔은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염려될 정도였지만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잘 왔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도시에 살던 것이 꿈인지, 제주도생활이 꿈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제주도행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내가 원한 것은 한적한 시골 생활이지 않았나?
'근데, 나 왜 이렇게 바쁘지?'
마을에서 발 넓은 현지인을 첫 이웃으로 만난 덕에 제주도를 속성으로 배웠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스파르타식 훈련이었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바로 어멍에게 호출이 왔다. 이 어멍 저 어멍도 나왔다. 어멍들은 나를 차에 태워 어느 날은 제주 남쪽으로 어떤 날은 북쪽으로 이동하며 자신들이 알고 있는 온갖 맛집과 명소로 데리고 다녔다. 아픈 부위마다 가야 할 병원은 물론 제주도에서도 어느 지역 귤이 맛있는지 해녀에게 일 년 치 성게 사두는 것 등 ‘현지인의 제주살이’를 배울 수 있었다.
종일 차에 실려다니다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집 앞에 내릴 때는 도시에서 일할 때만큼 피곤해서 정말 눈이 떼꾼할 지경이었다.
"다 왔습니다~언니, 내일은 애들 보내고 9시에 바로 보게요."(9시에 나오란 얘기)
'내일... 또.. 가는 거지?!'
그 외에도 이주해 온 첫해부터 마을 체육대회 아이들 다니는 초등학교 동문 체육대회에 나가 커피 봉사를 열심히도 했다. 마을 바자회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아이들 학교에서 주최하는 '학부모와 행복나들이'에 참여해 ‘한라산 등반'도 했다. (그 뒤로 나의 사족 보행 등반은 학교 선생님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었지만!)
제주도를 글로 배울 때 현지인의 텃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봤지만 어디든 '사람'의 문제일 터였다. 텃세가 없었다곤 할 수 없겠지만 내가 그들의 터전으로 들어온 이상 그들 문화를 배우려 노력하는 게 맞았다. 불러주면 고마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도울 뿐이었다.
제주도 배우기 스파르타식 수업은 100일가량 진행됐는데 ‘백수 과로사'란 말을 상기하며 서서히 내 생활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모르긴 해도 3년은 족히 걸려야 알게 될 제주에 대한 정보를 3개월 만에 알게 된 건 연고도 없는 낯선 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시장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언니, 어디가 멘?"(언니, 어디 가는 거야?)
누구라도 만나 근처 카페에서 차 한잔이라도 하면 바로 문자가 날아왔다.
"언니, 00이랑 만난? 무사?"(언니, 00이랑 만났어? 왜?)
(아, 작은 마을은 절대 한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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