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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로 이주 한 뒤 나는 많은 것이 가벼워졌다. 도시 생활의 거품을 거둬내고 나니 큰돈은 없지만 빚 없는 삶이 주는 평화로움을 얻었다. 최소한으로 쓰며 소박하고 단정한 일상을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몇 살에는 얼마큼 돈을 벌어 놔야 하고 어느 정도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인 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어야 했다. 간혹 사회적 잣대로 판단하려는 이를 만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만큼 굳건할 일이었다.
제주도 작은 촌 마을이라 했지만, 놀랍게도 부자는 모두 그 마을에 다 모여 사는 것 같았다. 친한 마을 어멍들 역시 그랬다. '부자'로 보이기 위해 그들도 거품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 때 확실히 부자가 맞았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겨우 거품을 다 걷어내고 제주까지 왔는데 기죽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관계 맺기를 시작한다면 스스로 휘둘릴 삶을 살 것이 분명했다.
친한 이웃을 차례로 소개받았다. 그들은 외지에서 온 이에게 무척 관심이 많았다. 나 역시 연고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이웃이 생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궁금했던 그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언니, 몇 살이 멘?"(언니 나이 어떻게 돼요?)
"나이는 왜요?" (대뜸 나이는 왜 물어보나?)
평소 우리나라 사람들 남의나이부터 묻는 거에 질색하던 나는 조용히 웃으며 일단 반격을 해보았다.
(여긴 나이부터 말해야 한다란 뜻)
단호한 그녀들의 반응에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나이를 밝히자 곧바로 서열정리가 완료됐다.
"언니, 이름은 뭐?"(이름은 어떻게 되냐는 좋은 뜻)
다음 질문은 이름이었다. 도시에선 흔히 아이 이름으로 00 엄마라 불리는 경우가 흔했던 탓에 질문받은 순간 이름이 금방 생각나지 않더니 겨우 꺼내 놓은 것도 내 이름 같지가 않았다. 서로 통성명이 끝나자 나이에 따라 이름을 붙여 00 언니라고 부르거나 00아!로 바로 말을 놓는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린아이에게도 말을 잘 놓지 못하던 나는 그녀들과 친하게 지내면서도 말을 놓고 이름을 부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문화는 뭔가 정답고 좋았다.
다음 질문은 어디서 뭘 하다 여기에 왔느냐였다. 이웃으로 온 낯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질문이 여기까지 왔을 때 결심했다. 그녀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아주 솔직한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말이다.
도시에서 치열하게 벌어서 먹고살았음. 장학금 받아 유학하는 큰딸 체류비 보탰고 딸 공부 마치면서 제주에 오게 됐음. 그리하여 난, 빚도 없지만 돈도 없노라! 나 생긴 대로 소박하고 조용히 이 마을에서 살 예정임!
너무 속을 까보여 솔직히 말한 탓에 듣는 어멍들을 적잖이 당황케 한 것 같았지만 새로운 곳에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놓고 새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난 고마울 때면 맛있는 반찬을 정성껏 만들어 보답한 게 전부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은 곁에 있을 테고 그래서 싫은 사람은 떠날 일이었다.
아! 얼마뒤 어멍들의 부탁으로 독서논술 수업을 시작하며 백수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별다른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사교육 선생님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럴 때 인생은 좀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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