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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12. 2023

제주 바람이 삼켜버린 ‘끝말’

(이전글에서 이어집니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아이들 말투가 달라졌다.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줘."

"알안?"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았냐는 말이에요."

"왜 말이 그렇게 짧아? 그렇게 말 안 하면 안 될까?"

평소 다른 건 몰라도 정확한 언어구사에 관심이 많은 논술선생 입장에서 무척 거슬리는 말투였다. 하지 말라면 더 잘하는 아이들은 제주 토박이 친구의 말투를 열심히 배워 금방 따라 했다.


"오라방! 밥 먹으라 게!"(오빠! 밥 먹어!)

초등학교 1학년이던 막내는 마치 제주에서 태어나 살던 아이 같았다. 제주 언어 특유의 억양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뭐꽝?'(왜 그러는 거야?)

'쟈이 누게 (저 아이는 누구야?)

'그러 멘' (그런 거야?)

'내불라'(상관하지 말아)

'어서어서(없어 없어)


막내는 밖에서 놀고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말을 배워왔다. 처음 듣는 제주말은 억새기도 했지만 말끝이 짧아서 너무 가볍게 들렸다. 아이가 사투리를 쓰는 게 귀여우면서도 속에서 자꾸 논술 선생이 튀어나왔다.


물론 지금은 나도 모르게 제주 사투리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정겹게 느껴져 따라 하기도 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동네 미용실에 커트를 하러 갔는데 해녀 삼춘 두 분이 파마를 말고 앉아 큰소리로 대화를 하고 계셨다. 나는 한 시간이나 그 옆에 앉아 있었으나 삼춘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제2 외국어가 따로 없었다. 


제주도는 바람이 거세고, 바닷일을 하는 환경 탓에 모든 단어가 축약돼 사용됐다. 제주도로 오기 위해 한참 '제주도 공부'를 할 적에, 제주도 사람이 불친절하다는 리뷰가 많았다. 괸당문화, 텃세가 심한 곳이라고도 했었다. 짧게 변형된 끝말과 문장을 압축해 사용하는 이곳 언어문화가 외지인에게는 불친절한 모습으로 비쳤을 것이라 이해가 됐다.


제주는 지금도 거센 바람만 불어도 고립되는 섬이고 이곳엔 평생 한 번도 육지에 나가 본 적 없는 이가 여전히 있다. 과거 제주도는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임에도 육지에서 죄지은 이가 보내지는 유배지였고 악몽 같은 4.3 사건을 겪으며 피붙이를 잃고도 말 한마디 못한 채 평생 죄인 오명을 쓴 부모님의 땅이었다.


이곳 사람들에게 의지 할 것이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믿을 수 있는 이웃뿐이었을 것이다. 괸당이란 문화가 안 생길 수 없고 그것이 텃세 아닌 텃세로 비쳤을 것이었다. 나 역시 텃세나 괸당 문화를 한 번도 못 봤다고는 못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역사를 잠시만 되짚어봐도 이해가 될 일이었다.


그들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려 애쓸 필요도 없었고 끼워주지 않는다고 서운 할 일도 없었다. 내가 만난 제주 사람은 쉽게 마음을 주진 않았지만, 마음을 열 때는 누구보다 진심을 주고 의리를 지켰다. 타인과의 관계가 그러면 된 것 아닐까?

만약 아이들과 제주에 여행을 온다면 제주도에 대한 역사를 미리 알아보고 그 장소에 방문해 보길 권한다.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진정한 교육은 사실 그런 모습으로 전하는 게 맞을 테니까.


제주 바람이 삼켜버린 ‘끝말’에는 제주 사람의 투박한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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