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와서 정말 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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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왕 제라지게 지 꺼졌어 이! (제주 와서 정말 신났어!)
처음 제주도에 도착한 건 6월, 수국이 만발할 때였다. 가는 곳마다 색이 다르거나 같은 색 수국이 탐스럽게도 피어 있었다. 수국 색깔이 다른 것은 흙의 성질 때문이라고 했다. 산성의 흙에서는 푸른색 꽃이, 염기성 흙에서는 붉은색 꽃이 핀다고 했다. 제주에선 마당에 수국을 심어 놓고 꽃이 피어봐야 흙의 성질을 알 수 있다 했다. 붉은색 수국을 보고 싶었는데 꽃이 피고 보니 푸른색이라며 아쉬워하던 이도 있었다.
아이들과 부지런히 놀러 다녔다. 도시에서 일하는 동안 함께해주지 못한 시간을 만회할 요량으로, 마치 곧 다시 떠나야 하는 여행자처럼 시간을 아껴가며 놀았다.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시작되는 제주의 여름은 6월에 이미 바다 수영이 가능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간단히 간식과 작은 텐트를 챙겨 해변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노을이 질 때까지 모래 놀이를 했다. 처음엔 둘이 놀다 금방 친구가 생겨 여러 명이 같이 놀았다. 지는 석양 아래서 아무 걱정 없이 놀고 있는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 내길 잘했구나 힘을 얻던 시간이었다.
모래가 잔뜩 뭍은 수영복 위에 커다란 타월 하나만 걸치고 3분 거리 집까지 걸어오기만 하면 됐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신나게 잘 놀은 하루가 저물 무렵, 따뜻한 저녁을 먹은 우리의 하루는 온전히 평화로웠다.
'이렇게 보내도 시간이 잘 가는구나.'
제주의 여름볕은 무척 뜨거웠다. 슬리퍼를 신고 걸으면 발등이 데일 것처럼 뜨겁다가 이내 발등에 슬리퍼 끈 자국을 선명히 남겼다. 여름휴가를 제주 바다로 많이 오지만, 사실 제주의 여름은 외부 활동이 쉽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해변에 나가려면 오후 5시는 돼야 했다. 땡볕에서 한 시간만 놀아도 아이들 정수리를 따라 이어진 가르마 마저 갈색으로 그을렸으니 더위에 단단히 대비를 해야 했다. 사실 도민들은 너무 더운 8월에는 근처 수영장 있는 저렴한 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여행객이 몰리는 한 여름에는 해변보다는 실내 수영장을 좋아했고 나 역시 점점 노는 것에 도가 트고 있었지만 우리가 무엇보다 여름이 되길 기다린 행사는 따로 있었다.
제주에는 8월이면 '제주 국제 관악제'가 열렸다.
6.25 이후 어려운 시절에 나팔을 불어 제주 사람들의 애환을 달래줬다는 작은 움직임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 세계 연주인들이 참여하는 국제적인 행사가 된 동기부터 마음에 들었다.
'제주 국제 관악제'는 한 장소에서만 열리지 않고, 관악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 제주 전역에서 다양한 팀의 연주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린 미리 팸플릿으로 일정표를 확인한 후 보고 싶은 팀의 연주를 따라 투어를 했다. 연주회는 실내에서도 열렸지만, 야외에서 열리는 관악제는 제주의 풍광과 어우러져 무척 아름다웠다. 제주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 관악기의 묵직한 진동이 마음속 가득 울리는 순간이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이나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상에 흔들리던 시간들과 도시에서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던 걱정과 불안이 덧없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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